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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선택권과 생명권 둘 다 논의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국가 인구정책의 폭력과 차별의 실체는 드러나지 못했다. 실제로 여성이 선택 가능한 사회적 조건은 마련된 적이 없다. 낙태죄 때문에 안전하게 임신 중단에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했고, ‘죄’라는 규범은 성교육에서 피임과 임신 중단 교육을 통제했다. 이제 국가가 임신과 출산의 허용 가능한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번 결정과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이 모자보건법이다. 14조 ‘인공임신중절 수술의 허용 한계’ 1항 1호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적으로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한다고 규정한다. 낙태죄는 정상가족, 성별 규범, 성역할과 같은 규범 안에서 출산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압박한다. 반면 모자보건법은 장애와 질병을 낙태 허용 사유로 둠으로써 태어날 가치가 있는 생명에 위계를 두고 차별한다. 의학적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국민으로서 부적격한 자를 선별하는 것으로 장애인의 생명권은 위협받는다. 이 위치에 장애인뿐만 아니라 재생산 부적격자로 10대,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빈곤층 등 사회적 소수자가 놓인다. 낙태죄로 억압하는 출산의 정상성과 모자보건법의 허용 사유가 드러내는 출산의 비정상성이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재생산권을 통제해 왔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선 강제 불임, 낙태 시술이 동의 없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중증·정신장애인 시설 생활인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 비자발적 입소가 67.9%나 됐고, ‘다른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고’(38.3%), ‘목욕을 다른 사람과 해야 하는’(55.2%) 등 프라이버시 침해가 심각했다. 성적 실천은 문제행동으로 낙인화되고 자위, 연애 금지라는 규율은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성폭력은 외부에 드러나기 어렵다.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이 인권 침해를 정당화해 온 것이다. 

또한 14조 3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구조에서 이러한 조항은 장애인의 의사 확인을 무시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장애인의 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모든 장애 유형에 맞게 동의를 표시할 방법을 마련하고, 동의를 확인하는 사람의 책임을 지정하고, 지키지 않을 때 제재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장애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재생산권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현재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 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이나, 출산비용 100만원 지원으론 재생산 권리 전반을 보장할 수 없다. 

“골형성부전증 장애가 있는 할머니 본 적 있어?” 장애 여성의 질문이다. 어느 시대, 어디서나 살았을, 또 현재를 살아갈 장애인을 상상한다. 장애와 살아갈 삶에 대한 걱정은 필요없다. 장애인 차별을 철폐하고 성과 재생산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보장하면 된다. 우선 강제 불임 실태조사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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