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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중국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귀국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곳 공항 출국심사대에서 문제가 생겼다. 내 여권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여권과 비자 부정 발급과 매매가 이슈가 되던 때였다. 심사관은 내 여권을 한동안 들여다보고, 또 한동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권의 사진과 내가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여권이 가짜거나 내가 가짜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나. 증명서 사진이라는 게 대개 형편없기 마련이니 굳이 실물보다 잘 나온 사진이 아니었고, 또 완전히 그 반대였던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냥 내 얼굴인 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나. 그 얼굴이 내 얼굴이고 그 여권의 내가 나라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증명하나. 

들고 있던 가방에 다행히 다른 신분증이 있었다. 그래봤자 학교 어학코스에서 발급한 학생증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중국에서 발급한 신분증이라는 게 소용에 닿았다. 심사관이 두 신분증의 사진을 비교하고, 또 내 얼굴을 분석하듯이 날카롭게 바라보는 동안, 나는 기막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기막힌 것은 어이가 없어서였고, 우스운 것은 이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확대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숨기는 것이 없으니 당당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보통사람들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믿음이 아니겠나. 그러니 무서웠던 것은 뭐가 잘못될까 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서였을 뿐이다.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나는, 당신은, 누군가는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나.

최근에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카산드라>를 읽었다. 예언의 능력을 가졌으나 동시에 그 예언을 누구도 믿지 않는 저주를 함께 받은, 그리스 신화의 바로 그 카산드라다. 지식백과식으로 잠깐만 설명을 덧붙이면 카산드라는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설득력을 빼앗겼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었으나, 누구도 그녀의 말을, 그녀를 믿지 않았다. 그러니 이 여인에게 예언의 능력은 축복이었을까, 고통이었을까. 그녀의 가장 불행한 예언은 조국인 트로이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았다.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그녀의 절규는 무시되었다.

문득 드는 의문이다. 고통은 누구에게 있나. 진실을 말하였음에도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있나, 아니면 그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당면한 현실과 다가올 미래로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있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 믿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거 당신이잖아 묻는 질문에 절대로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명백한 사실, 확고부동한 증거, 혹은 증언, 그 어떤 것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눈물로 호소하는 사람들. 그들이 확대 재생산하는 거짓의 폭은 그야말로 위협적이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기는 너무나 어렵지만,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어렵지만,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이토록 쉽다는 사실은 기가 막히다가 우습다가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실은 통째로 무섭기만 한 일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니까. 권력과 돈과 커넥션의 문제니까. 그러니 그 앞에서는 동영상도 소용없고 증거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소용에 닿는 것일까. 죽어도 나는 내가 아니라는 사람에게 당신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진실은 힘이 세다. 아니다. 사실 어떤 진실은 매우 무력하고, 슬프기까지 하다는 걸 우리는 안다.

카산드라의 불행으로부터 비롯된 ‘카산드라 신드롬’이라는 말도 있다. 명백한 진실이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때를 말하는 이 용어는 종종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세상을 앞서 나왔을 때 사용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빨라 이제 와서는 그 속도를 앞질러가는 어떤 아이디어를 상상하기도 힘든데, 반면 여전히 구태의연한 자리에서 용도폐기된 예언을 거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걸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색깔론은 구태의연하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다. 카산드라의 예언이 저주가 되었던 것은 아폴론의 신탁 때문이 아니다. 진실과 거짓보다 힘과 진영의 논리가 더 기본이 되는 세상이 오히려 그 이유다.

소설 <카산드라>의 작가 크리스타 볼프도 논쟁에 휩쓸렸던 인물이다. 동독 출신 작가로서 비밀경찰에 협력했던 기록으로 인해 그녀의 문학 자체에 대해서도 무수한 논쟁이 따라붙게 되었다. 크리스타 볼프는 아마도 카산드라처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귀를 기울이되, 잘 기울여야겠다. 논쟁과는 상관없이, 크리스타 볼프의 문장은 한 줄 한 줄 씹어 먹어야 하는 문장들이다. 귀 기울이듯이 읽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말들 역시, 그렇게 한 줄 한 줄 들어야 할 것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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