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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도 개인에게도 격동의 물결이 스쳐 지나갔던 한 해를, 그리고 많이 부족했지만 나무와 함께 삶을 생각해 보았던 시간을 일상에서 내어주었던 이 ‘나무야 나무야’ 생태 칼럼의 마감을 어떤 나무와 함께하면 좋을까를 며칠간 고심했다. 우연히 국립수목원 숲해설가 선생님들이 1년간 자연에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새로운 주제의 해설프로그램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참나무와 곤충들’이란 주제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연말연시가 되면, 우리는 독야청청 푸른 소나무나 기세 드높은 전나무를 떠올리며 그렇게 어려운 역경을 극복해 가며 싱그럽게 살아가기를 다짐해 보지만, 이리저리 상처 입은 오래된 참나무와 그 숲을 기대고 살아가는 곤충들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나무에 곤충은 무엇인가? 벚나무나 사과나무처럼 아름다운 꽃이나 풍성한 과실들을 바라는 여러 나무들은 곤충들에게 꽃가루받이, 즉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참나무처럼 바람이 그 과정을 돕는 나무들에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참나무에 곤충들은 해가 되는 경우들이 많다.

제일 먼저 소개된 곤충은 ‘도토리거위벌레’였다. 참나무숲에 가보면 잎새 몇 개와 도토리를 달고 있는 가지가 마치 가위로 자른 듯 똑똑 잘려 바닥에 즐비하게 떨어져 있는데 바로 그 곤충이 한 것이다. 이 곤충의 어른벌레는 연한 참나무 가지를 잘라 땅에 떨어뜨린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도토리를 양분으로 삼아 먹으며 자라고, 다 크면 땅속으로 들어가 번데기가 되어 봄을 기다린다.

갖가지 딱정벌레나 나비들을 만나려면 오래된 참나무의 줄기에 상처가 생겨 수액이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보면 된다. 특히 밤이 되면 낮에는 구멍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밤에 수액이 있는 곳에 출현하여 먹이를 잡거나 짝짓기를 하고자 하는 곤충들이 스펙터클한 다큐를 만들어 낸다. 네점무늬무당벌레붙이나 사슴벌레붙이처럼 썩어서 죽은 나무들에 붙어 살아가는 곤충들도 있다.

오래 묵은 참나무 가지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버섯들도, 새들도, 다람쥐도 있다. 이런 삶의 일부를 참나무에 기탁하는 생물들이 나무에는 어떤 도움을 주는 걸까.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다른 침입 해충들을 조절해줄 수도 있겠으나 참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역할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참나무에서는 또 하나의 배울 점이 있다. 견디어 때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많은 분들이 아직도 고향 마을 뒷산을 생각하면 소나무숲에 진달래 무리가 어우러진 풍광을 떠올리시겠지만 지금 우리 산의 대부분은 소나무숲에서 참나무숲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숲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천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는 천이의 초기 수종으로 햇빛이 꼭 필요한 양수라고 한다. 소나무 이외에는 잡목으로 취급당해 모두 땔감 등으로 잘려나갔던 참나무는 더 이상 산을 수탈하지 않아도 되는 풍요로운 시대를 기다렸다. 음수로 다른 나무 그늘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참나무는 햇빛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소나무숲을 극복하고 우리 숲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참나무란 이름도 사실 아우름의 폭이 넓다. 소나무는 적송이나 육송이라는 별명도 있지만, 딱 한 종류의 나무를 지칭한다. 소나무의 형제 나무들도 많지만 잣나무나 곰솔처럼 각각의 다른 이름을 가진다. 하지만 참나무는 우리의 대표 수종이면서도 식물도감에선 찾을 수 없다. 도토리가 굵고 풍성하며 선조가 몽진 갔던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여 항상 수라상에 올리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상수리나무’를 비롯하여, 수피에 코르크층이 두꺼워 굴피집을 만드는 데 쓰인 ‘굴피나무’, 우리나라 산의 높은 곳에 대부분 군락을 이루는 ‘신갈나무’ 등 도토리를 맺는 모든 나무를 우리는 참나무라고 부른다. 소나무와 같이 빼어난 하나에 주목하는 문화와 달리, 여럿이 어우러져 커다란 하나가 된 참나무란 이름도 미래 시대에는 좋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참나무들은 지금 잎새를 모두 떨구고 그 굴곡의 줄기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다. 울퉁불퉁 상처가 아물어 혹처럼 불거진 흔적에는 도토리를 떨어트려 허기를 채우고자 돌로 줄기를 두들기던 아픔의 시간들마저 담겨 있다. 하지만, 새봄이 오면 이 땅 곳곳의 참나무들은 세상에서 가장 보드라운 연하디 연한 새순을 내어놓을 것이다. 여전히 새와 곤충을 불러들여 터전을 내어줄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노랫말처럼 여전히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는 떡갈나무숲으로, 건강을 돕는 식품 도토리묵 등으로, 자연미 넘치는 오크(oak) 가구나 술의 풍미를 더해주는 오크통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앞에서 참나무를 생각하게 해주신 해설가분의 마지막 슬라이드와 말씀이 생생하다.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에 수많은 버섯들이 피어난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부디 부디 오래되어 쓰러진 참나무도 베어 내지 말아주세요. 그 그루터기엔 수십가지의 생명들이 살고 있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은 삶은 참나무처럼 더 많은 것을 품어내며 살았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 동안 ‘나무야 나무야’를 읽어주시고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때론 푸른 소나무처럼, 때론 향기로운 수수꽃다리처럼, 때론 도토리 풍성한 참나무처럼 여러분의 삶이 아름답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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