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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변에서 믿기지 않는 소문이 소리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모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이 도로에서 비서를 하차시킨 뒤 가버렸다는 것이다. 비서의 업무수행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내린 벌이라고 했다.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간부도 외진 도로에서 하차당했다는 말이 들렸다. 직원을 상대로 선관위의 임무를 잘 나타낸 여덟 글자 구호(엄정중립, 공정관리)를 제대로 외우는지 불시 퀴즈를 내는가 하면, 이 상임위원이 선호하는 음료의 온도를 잘못 맞췄다가 직원이 혼쭐이 났다는 이야기가 뒤를 이었다. 요새 같으면 ‘위원님 갑질’로 미투 운동이라도 벌어졌을 법하지만 당시 선관위는 속으로만 전전긍긍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라는 위세에 감히 맞서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도 나오게 마련이다. 하필이면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이 원칙주의자 김능환 대법관이었다. 김 위원장은 사무처의 보고를 받은 뒤 조직 체계에 허점이 있음을 간파했다. 상임위원이 선관위의 결재라인에 있는 게 문제의 근원이라고 본 것이다. 선관위 사무총장 출신의 상임위원이 사무처 위에 군림한 전례 때문에 옥상옥이라는 비판도 있던 터였다. 이 상임위원은 꽤 강하게 반대했지만 김 위원장은 특유의 논리와 카리스마로 상임위원의 결재라인 배제를 관철시켰다. 내부 위임전결 규정을 개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상임위원은 선관위 사무처의 활동에 대해 보고를 받을 뿐 업무를 직접 지시할 수 없게 됐다. 선관위 직원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한국당은 한 달 넘게 문재인 대통령의 조해주 상임위원 임명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내년 총선에서 선관위를 입맛대로 부리려고 그를 앉혔다는 게 한국당의 주장이다. 선관위 상임위원은 허수아비도 아니지만 선관위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우선 국회와 대법원이 지명한 다른 선관위원들이 그런 독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선관위 조직을 실제 지휘하는 것은 같은 장관급인 선관위 사무총장이다. 교수 시절 극우적인 칼럼으로 인사청문회에서 질타당한 문제의 상임위원도 중립성 훼손은 시도조차 못했다고 한다. 속마음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는 재임 내내 선관위의 중립성을 강조했다. 외부의 청탁에는 단호히 대응했다는 증언도 있다. 지난 10년 사이 선관위 중립성은 이 정도로 정착해 있다.

조해주 상임위원 임명에는 분명 우려할 대목이 있다. 선관위에서 조 상임위원의 역량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어부지리로 기용됐다는 설이 파다하다. 유력 후보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검증은 통과했지만 정무수석실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그가 대타로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기용에는 함정이 있다. 퇴직했다가 최고위직으로 컴백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점이다. 조 상임위원이 문재인 캠프를 위해 선거법 자문을 한다는 소문이 났을 때 선관위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사무차장(차관급)에 오르지 못하자 몹시 억울해했다고 한다. 조 상임위원처럼 절치부심 끝에 정무직으로 되돌아오는 사례가 거듭된다면 선관위의 ‘심판’ 자격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당이 진정 선관위의 공정성 훼손을 걱정했다면 이런 점에 주목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당은 줄곧 문 대통령의 행위만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선관위 상임위원이라는 직책과 달라진 실상을 모르는 엉뚱한 주장이다. 그게 아니라면 공세를 위한 공세이다. 선관위 주변에서는 한국당이 과거 자신들이 상임위원을 통해 중립성을 위반하려 했음을 자인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말이 돌고 있다. 옛날 도둑질 생각에 제발 저린 격이라는 것이다. 선관위 공정성을 높이는 방안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점에서 저의를 의심받고 있다.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상임위원을 통해 선관위를 조종하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것이다.

지금 선관위의 중립성을 제고하려면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상임위원이 여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의심받는 것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대신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임명하는 것도 대안이다. 실제 5공화국 이전에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상임위원을 뽑아 보냈다. 선관위 사무총장이 바로 상임위원으로 가는 관행도 개선해야 한다. 사무총장이 상임위원으로 가려고 선관위 조직을 이용해 정치권에 봉사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당이 과거 선관위에 한 일은 잊은 채 중립성 운운하는 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당은 조 상임위원 임명 철회나 자진 사퇴 주장을 접고 새로 전략을 짜야 한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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