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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달아오르는 지금, 정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두 편의 영화가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첫 번째는 조만간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다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인데,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 광해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둘로 쪼개서 긍정적인 대통령 상을 부각시키는 영화이다. 흥미롭게도 이 긍정적인 대통령 상이라는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에서 ‘직선제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국민’의 대리자이다.
합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국민’의 요구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권력의 인격화가 바로 이런 대통령인 것이다. 권력다툼이나 벌이는 신하들의 모습은 어딘가 정치인을 닮아 있고, 권력의 음모로 내세워진 ‘가짜 광해군’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국민의 난제를 해결해주는 ‘진짜 주권’으로 그려진다. 이런 내용 탓인지 <광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안철수 후보에 빗댄 해석도 트위터상에서 종종 보인다.
<광해>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인 영화는 바로 <회사원>이다. <광해>가 거리낌 없이 대선판세를 참조하고 있다면, <회사원>은 그 선거라는 장치가 제대로 조망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잘 만들어진 누아르에 속하는 <회사원>은 충실히 장르의 문법에 따른다. 그러나 분위기는 홍콩 누아르의 낭만주의를 비껴서 하드보일드라는 누아르 자체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한다. 감독이 왜 이런 꼬장꼬장한 방식을 택했는지 영화를 직접 보면 알 수가 있다. 누아르라는 비현실적인 장르의 규칙을 따르지만, 실제로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수처럼 박히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해고는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김진숙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절규가 이 영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물론 이 변주가 왜 필요했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이 감추고 있는 실재의 풍경을 드러내기 위해 <회사원>은 리얼리즘을 선택하지 않고 누아르라는 판타지로 숨어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사원>이 현실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출처: 경향DB)
<광해>도 마찬가지지만,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두 영화가 선택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우회였다. 군사독재시절이었다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했겠지만, 아무리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해도 의도를 감춰야 할 정도로 정부의 간섭이 영화 제작에 가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두 영화가 선택한 현실에 대한 우회는 정부의 검열이라기보다 자기검열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기검열의 배후는 바로 시장일 것이다. 관객이 얼마나 이 영화를 보러 오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장의 요구로 인해 감독은 현실에 대한 직접 표현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역사극이나 누아르라는 당의정을 입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금 영화 바깥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영화 안에서 비쳐지고 있는 비현실이 하나로 겹쳐진다. 정치적인 것을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제약이 두 차원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치인들조차도 비정치적인 당의정을 입힐 수밖에 없는 대선국면이 두 영화에서 어른거린다고 하겠다.
또한 <광해>와 <회사원>은 현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두 관점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광해>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직선제 대통령제’의 극단을 추구한다면, <회사원>은 그 대통령을 통해 실현하려는 주권의 실상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광해>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회사원>은 노동계급 정치를 이야기한다. 이런 측면에서 <광해>가 중세적인 영웅담에 기댄다면, <회사원>은 사회학적 분석에 기초한다. <회사원>은 누아르의 본성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정교하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고찰을 제공한다.
<회사원>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관리자와 노동자의 관계이다. 사용자가 관리자를 통해 어떻게 현장을 통제하는지, 그리고 관리자와 사용자 사이에 어떤 알력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은유가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현장도 모르는 놈이…”라는 명대사는 <회사원>이 어떻게 감춰진 현실에 개입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이다. <광해>보다도 <회사원>이 관객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살벌한 폭력 장면이라기보다, 현실의 잔혹성을 누아르의 문법에 실어서 눈앞에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해고자는 ‘살해당한 자’에 가깝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들에게 <회사원>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환기시킨다. <광해>와 <회사원>, 둘 중 어떤 영화에 더 공감하는가에 따라 ‘어떤’ 정치를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대통령으로 모든 정치를 수렴시키는 것에 불만이라면, <회사원>을 보고 그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것도 ‘또 다른 정치 행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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