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대선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세 후보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있지만, 쌀쌀해진 날씨만큼이나 선거 판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랭한 것 같다. 누가 봐도 흥행이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대를 모았던 ‘안철수 현상’은 ‘또 다른 야권 후보’ 하나를 만들어내는 수준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정권교체나 정치개혁이라는 ‘바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단일화라는 지루한 제살 뜯어먹기 경쟁이 최대 이슈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언론들은 파당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선전선동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5년을 보내게 될 차기 정부의 구상에 대한 생산적인 이야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쯤 뜨겁게 끓어올랐어야 할 인터넷 여론마저 ‘문-안 단일화 공방’보다도 ‘진-변 사망유희’에 더 관심이 쏠려 있는 형국이다.
대선이 한창이지만, 정치보다도 야구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는 어떤 지인의 말을 들으니, 정치 무관심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범국민적인 ‘탈정치성’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바람’의 계기를 적절하게 살려내지 못한 야권 후보들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이번 대선을 2002년에 비유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빨간 파티'에 참석한 새누리당 이준석 전 비대위원, 김상민 의원, 손수조 당협위원장. (출처; 경향DB)
무엇보다도 쇄신의 열정이 미약하다는 것이 큰 차이다. 2002년 선거는 후보교체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협상에 공격적으로 임한 결과, 기사회생한 사건이었다. 이런 ‘극적인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쇄신의 열정에 기초한 정치개혁의 가능성이었다. 지금 민주당은 이 모델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면 자신들에게 다시 ‘승리’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쇄신과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자신들이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와 더불어 2012년 대선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전면에 나서는 30대 정치인이 야권 후보 캠프에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새누리당이 이준석과 손수조를 내세워 젊은 세대 친화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 전례가 있다. 2002년에 ‘바람’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정치쇄신에 대한 열망을 가진 젊은 세대 정치인들이 대거 선거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구호가 가치 기준으로 명쾌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새로운 것은 거의 없고 낡은 것들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모양새다.
정치쇄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인적쇄신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고 밀어붙일 30대 정치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난 총선에서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천 문제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386세대 정치인들은 이제 더 이상 젊은 세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대선 판도를 좌우할 것이라는 20~30대들은 그 정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보다 특정 후보를 위한 ‘알바’로 성실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30대 정치인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는 정치개혁의 절박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준다.
그만큼 정치무대에 장삼이사들이 올라서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최소한 ‘국회의원’이라도 되려면, 번듯한 이력사항을 구비하고 있어야 할 텐데, 2012년을 살아가는 한국의 20~30대들에게 ‘정치인 되기’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여전히 한국에서 정치는 무엇인가 자격을 갖춘 ‘그들만의 리그’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정된 직장도, 단란한 가정도, 심지어 일관된 주거지도 쉽게 가질 수 없는 20~30대들에게 정치는 지금 여기 발 디디고 선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기보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오르내리는 예능프로그램의 가십보다도 실감을 주지 못하는 일이다.
‘바람’을 일으킬 당사자들에게 통로를 열어주지 않은 채, 기성 정치인들은 툭하면 투표하지 않는 20~30대들을 타박한다. 20~30대들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한 노릇일 것이다. 2002년에 정치무대 전면으로 나섰던 정치세력에 값하는 젊은 세대가 2012년에 없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국회의원 수를 줄이겠다는 정치개혁안이 원론 차원에서 잘못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당정치의 상황이 이렇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국회의원 수가 많을수록 정당이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반영해 권력을 더 용이하게 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은 군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대선 구도를 새로운 것과 낡은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열정과 감동은 사라지고 단일화 공방만이 남게 되었다. 통합의 정치도 실종되고, 남은 것은 정치공학에 맞춘 셈법이다. 기성정치의 구태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정은 식어가고 있다. ‘안철수 현상’을 떠받쳤던 에너지가 변화를 바라는 20~30대들의 기대에서 분출되었다는 사실을 기성 정치권은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다.
'=====지난 칼럼===== > 이택광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택광의 왜?]낡은 것들의 대결 (0) | 2012.11.29 |
---|---|
[이택광의 왜?]단일화는 게임, 본선은 정치 (0) | 2012.11.15 |
[이택광의 왜?]‘광해’의 대통령, ‘회사원’의 대통령 (0) | 2012.10.18 |
[이택광의 왜?]자기계발 (0) | 2012.10.04 |
[이택광의 왜?]열망을 수렴한 낯선 출사표 (0) | 2012.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