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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이 난항에 봉착했다는 소식이다. 안철수 후보 측은 문재인 후보 측이 사전 약속을 깨고 ‘양보론’을 흘렸다는 이유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기대처럼 단일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는 생각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권교체가 정치적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단일화는 게임이다. 게임은 규칙을 만드는 일이다. 규칙이 없다면 게임도 없다.
안 후보 측에게 문 후보 측은 정해진 규칙을 바꾸려는 묘수를 부리는 모양새로 비쳤을 것이다. 문 후보 측은 ‘오해’라고 해명했고, 안 후보 측은 여기에 다시 반발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번 일이 단일화에 대한 양 후보 측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흥미를 자아낸다. 일단 게임의 규칙이 확정되면, 모든 행위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묘수로 읽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발언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게임의 유불리에 따라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문 후보 측은 단일화를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일화와 정권교체를 분리시키고 있는 태도가 확실히 읽힌다. 조직력을 동원해서 게임에서 이기면 된다는 상황인식이다. 반면, 안 후보 측은 단일화를 정권교체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단일화 자체보다도 ‘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다. 단일화가 되면 양자대결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 테다. 그러나 문 후보 측과 안 후보 측은 정권교체라는 명분에서 합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일화라는 게임에서 서로 다른 규칙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행선을 달렸다고 하겠다. 모바일 경선과 여론조사 방식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아직 게임의 규칙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모든 게임이 그렇듯이, 단일화라는 게임도 시작과 동시에 규칙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끼리 규칙을 약속해야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 후보 측은 이렇게 필요에 따라 규칙을 정하는 것 자체도 게임으로 보는 반면, 안 후보 측은 지금까지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것을 게임의 규칙으로 보는 듯하다. 서로 다른 입장의 간격을 어떻게 좁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해야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단일화 국면을 각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고자 했을 뿐, 대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태를 보고, 문 후보 측은 노련하고 안 후보 측은 순진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일부에서 보기에 안 후보 측의 아마추어리즘이 다시 드러나는 지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일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이런 상황을 그토록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던 ‘정치의 귀환’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정치와 게임은 얼핏 서로 불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를 어떻게 개념화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안철수 문재인 협상 시작 (출처: 경향DB)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정치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쓰도록 만드는 갈등상황이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끼리 만들어낸 규칙에 의거한다. 아무리 흥미진진하다고 해도 ‘그들만의 리그’를 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단일화 게임은 양자대결이라는 점에서 더욱 참여의 폭이 좁아진다. 일부러 위악적으로 말해보자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났던 정치개혁의 열망을 붙잡아두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치는 없을 것도 같다. 게임은 정치인 것처럼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그 규칙에 참여하는 이들끼리 승부를 겨루는 것에 불과하다. 단일화 게임이 끝나면 다른 규칙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조직력’을 이용해 민주당이 세몰이를 했다는 의혹과 보도가 이어졌는데, 여기에 대해 ‘관행’이라는 옹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당 조직을 동원한 선거운동이 불법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권교체를 위해 단일화를 하는 것이라면, 여론조사의 핵심은 누가 본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조직 바깥의 의견을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필요한 것이다. 게임은 적대적인 관계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적대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다. 게임에서 승리한다고 정치에서 성공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일화는 게임이지만 본선은 정치다. 정치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이번 대선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치공학적인 발상에서 권력분점만을 목표로 한다면, 구체제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을 비롯한 중요한 의제들이 실종되어버린 것도 단일화 게임을 정치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 정치인들의 상황인식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단일화해서 정권교체를 할 것인지, 그 정치적 명분을 다시 세워야 한다. 이번 대선이 낡은 정치가 맞닥뜨리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로 나아가는 비상구여야 하겠지만, 이것을 기대하기에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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