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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고객님, 신제품 할인행사가 있으세요.” 요즘 익숙하게 듣는 ‘이상한’ 경어체이다. 고객과 구매할 상품을 동시에 존대하는 이런 말투를 들으면 야릇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법 파괴를 개탄하는 소리를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는데, 이 문제를 그냥 ‘개념 없는 젊은 세대’ 탓으로 치부하고 지나가기에는 개운치 않은 점이 있다. 고객과 상품을 동시에 높이는 경어체야말로 한국 사회의 노동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상 같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객은 무엇인가? 자본을 소유한 특별한 신분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들이다. 소비자는 화폐를 사용해서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생산한 상품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셈이다. 화폐의 매개 없이 상품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횡령 아니면 절도에 해당한다. 근대사회는 이런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금지하고다.
(경향신문DB)
화폐는 곧 상품을 가질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동시에 표상한다. 이 표상 관계로 인해 어떤 상품을 소유할 수 있는지에 따라 특정인의 능력이 판가름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객과 상품 모두를 올리는 ‘존댓말’은 실제로 고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상품을 특화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고객은 상품을 소유함으로써 비로소 특정한 자격을 가진 존재로 인준받는다. 상품은 마치 매트릭스처럼 처음 탄생의 순간만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자신을 만들어준 당사자를 배제한다. 루이비통을 만드는 노동자가 루이비통을 가지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상품은 생산자의 자격도 규정한다. 일전에 가짜 명품가방을 만들다가 검거된 어떤 이에 대한 보도가 있었는데, 문제의 업자는 과거 명품회사에서 직접 가방을 만드는 기술자였다가 퇴사 후에 몰래 가짜를 만들어 수십년간 유통시키다가 들통이 났다. 그러나 명품을 만들다가 퇴사해서 계속 명품을 수십년간 만들었다면, 그 직공이야말로 최고의 장인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명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셈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만든 제품은 정당한 상품 유통구조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짝퉁’으로 취급된다. 이 에피소드야말로 상품이 어떻게 생산자를 소외시키는지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자는 보람보다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이 ‘나’를 구성하는 요소라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즐거움이고, 이를 통해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 훨씬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생산자가 사라지고 소비자가 부각된 까닭이다.
“고객님, 신제품 할인행사가 있으세요”라는 표현은 그러므로 단순한 말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말이 보여주는 것은 상품의 판매를 위해 매개자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르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어떤 ‘감정노동자’의 궁여지책이다. 자신의 감정을 상품이라는 대상에게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는 태도야말로 지금 목도하고 있는 ‘소비사회’에서 장삼이사들이 살아남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영국은 중산층 대부분이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반면, 한국은 대조적으로 노동자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통계가 있다. 지금까지 이런 전도현상을 ‘국민의식’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각성하지 못한 대중’에 대한 비판이 이른바 진보를 구성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떻게 대중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다른 삶’을 갈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세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해 악을 제거하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한국 진보의 상황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거듭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진보세력 중 일부가 선택한 것이 결국 ‘조직 보전’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보수주의였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생존이 곧 전략이 되는 상황은 그만큼 변화로부터 격리되어온 그 집단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진보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은 정치공학적인 해결책도, 선거제도의 정비도, 야권연대의 유지도 아니다. 더 이상 특정 세력의 생존이 진보의 전략으로 치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고객님, 신제품 할인행사가 있으세요”라는 발화를 요구하는, 그 ‘틀린 문법’의 현실에서 진보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소비주의의 지층에 묻힌 대중의 정치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망각하고, 자신을 지키려는 그 의지야말로 권력의 논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신이 옳다고 믿지 않았던 폭군도 없었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은 폭력도 없었다. 이제 진보의 미래를 비춰볼 거울은 소비의 그늘에 가려진 생산자의 정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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