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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온갖 추측을 일순에 잠재운 놀라운 결론이었다. 1964년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공식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이번 수상 결정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상’을 ‘가수’가 수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음유시인을 예로 들면서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했지만, 궁색한 논리일 뿐이다. 엄연히 오늘날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고대의 시나 글과 다른 근대적인 글쓰기 체계이고, 수상 대상을 결정한 이들조차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문학’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의도야 무엇이었든 스웨덴 한림원이 파격을 노렸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사실은 많은 것을 암시해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는 이미 1964년 사르트르가 수상을 거부할 때 발표했던 ‘서한’에 감춰져 있다. 사르트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수상 거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사르트르는 작가로서 어떤 공식적인 명칭도 부여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작가는 오직 작가의 이름으로 불려야지 “노벨상 수상자 아무개”라는 식으로 불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기관이나 조직을 위해 작가라는 지위를 빌려주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었다. 그다음으로 사르트르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서 서방세계에서 주는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을 경우,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 삼는 ‘우파들’에게 “잘못된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71세 때인 201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물론 이런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소감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고, 다분히 당대의 급진적인 정치상황을 반영한 ‘과도한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는 노벨 문학상의 딜레마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을 거부하는 사르트르의 ‘소감’이라기보다, 그가 제시한 노벨 문학상의 정체성이다.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것이 ‘세계문학’을 대상으로 ‘자유’라는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노벨 문학상에 감춰진 정치적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사르트르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정치적 성격이란 것은 특별한 진영논리를 강화하거나 특정한 이념성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정치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르트르는 ‘세계문학’의 범주로서 노벨 문학상을 거론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원이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노벨 문학상은 1960년대 이후에 ‘세계문학’이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을 통해 명분을 유지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를 두고 몇 년간 논쟁이 펼쳐졌지만, 유럽이나 북미 문학상과 달리, 노벨 문학상은 특정한 언어권 문학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언어권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 으레 나왔던 푸념이 ‘번역’ 문제였지만 노벨 문학상이 포괄하는 ‘세계문학’은 단순하게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노벨 문학상은 기존의 ‘세계문학’,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문학시장’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발굴해서 새롭게 조명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딱히 특정 작가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수상 대상에 오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세계문학’이다. 사르트르가 수상 거부 소감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벨 문학상이라는 ‘세계문학발굴제도’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요하는 세계체제를 통합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했다. 사르트르도 스웨덴 한림원이 “부르주아적 기관”이기 때문에 이 상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이 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역설적으로 노벨 문학상의 ‘세계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이 불타오르던 그 시절 사회주의자 사르트르에게 논란을 일으킬 상을 받느니, 거부하는 것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할 법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노벨 문학상은 ‘세계문학시장’에 들어오지 못한 다양한 ‘문학들’을 포섭하는 기능에 충실했다. 사르트르 같은 ‘사치’를 누릴 수 없었던 제3세계 작가들이 이 ‘발굴제도’를 통해 ‘세계문학시장’에 자신들의 문학을 선보이고 각광을 받는 일들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밥 딜런의 수상 소식에서 읽히는 상황은 이런 노벨 문학상의 고유성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모종의 위기감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이미 작년부터 균열이 예감되었지만, 더 이상 노벨 문학상이 ‘세계문학시장’에서 권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조건도 이런 변화에 한몫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안과 밖이 무색해진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에릭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세계체제의 산물이다. 때늦게 밥 딜런이 ‘세계문학의 무대’로 불려 나온 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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