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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부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고, 외교안보 불안을 우려하는 국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정부는 강행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방적으로 배치 지역으로 통고받은 성주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았다. 항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단호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24일 오전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한 아파트 옥상에 사드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중국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한 조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통령 담화가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사실관계는 이런 대통령의 자신감을 의구심에 빠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안보’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사드는 수도권 방어용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미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비라는 보도가 설득력을 얻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완강하게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최초의 이유였던 북한의 미사일에 대응한다는 ‘안보’ 논리는 궁색해졌지만, 한반도의 전쟁 억지력을 담당하는 미군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상 한국의 ‘안보’는 전후 세계질서를 통해 형성된 것이고, 최근 학계의 연구가 뒷받침하듯이, 한국전쟁은 냉전의 결과라기보다 그 냉전을 본격화한 계기였다는 사실을 참조한다면, 미군을 통해 한반도의 안정을 보장받는다는 정부의 논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방한한 프린스턴 대학의 존 아이켄베리 교수도 지적하듯이, 냉전을 통해 형성된 전후 세계질서라는 것은 ‘필요악’에 가까운 리바이어던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질서의 기원이 잘못되었고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도, 이 리바이어던을 해체한 뒤에 찾아올 혼란은 지금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 반박하기는 쉽지만,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주장을 뒤집을 만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발간된 <세계질서>라는 책에서 헨리 키신저는 미국을 “양가적인 강대국”이라고 칭하면서 21세기 세계질서의 재편에서 이런 예외적인 미국의 본성은 긍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키신저는 미국을 지키는 동맹국이나 다자관계의 지지나 요청이 없더라도 이 질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키신저가 말하는 “미국적 가치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한 입장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맹렬하게 몰아친 ‘트럼프 현상’이 이런 키신저의 생각에 반하는 다른 미국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후 세계질서를 지탱해온 “양가적 강대국”이 과연 앞으로도 지속가능할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사드 배치를 둘러싼 분란에서 한국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재편에 편승하는 것이 ‘국익’에 합당하다고 판단한 것이고, 그래서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야당들 역시 이 문제에서 크게 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가장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당사자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주군민들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군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을 찾다보니 성주가 지목된 것이겠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이른바 세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지역’에 가해졌던 과거의 불행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가혹한 동족상잔과 인종청소의 명분은 바로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발명된 반공주의였다. 반공주의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왜 반대하는가. 자본주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왜 자본주의를 지켜야 하는가. 공산주의는 비인간적이고 자본주의는 인간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지난 상황들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라고 해서 특별히 인간적이었다고 말하기 민망해진다. 한창 자본주의 개발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난무했던 폭력은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공산주의 체제 못지않게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비인간성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한국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질서의 경찰을 자처해온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 사태들을 보면 이런 주장의 신빙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전후 세계질서의 문제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양자택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어떤 체제든 보편을 가장한 ‘질서’는 언제나 ‘지역’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 ‘질서’는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문제는 수면으로 떠오른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내 마당에 사드는 안돼”라는 ‘지역 주민’의 이기주의와 ‘국익’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은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지극히 거시적인 정치가 일상의 정치와 조우하고 있는 장면이다. 진정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까.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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