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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의미역을 가지고 쓰이긴 하지만, 대체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를 일컬어 프로불평러라고 부르는 것 같다.

프로페셔널과 불평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영어식 조어로 만들어낸 이른바 언어파괴형 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EU탈퇴 지지자들이 영국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말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2’ ‘쿨병’ ‘설명충같은 인터넷 용어들과 함께 특정 개인의 행동을 규범적으로 재단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말하자면, ‘프로불평러라는 말은 최근 인터넷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인 셈이다. 과거에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이 규범 파괴의 장이었다면, 불과 10여년이 흐른 뒤에 이 장은 역설적으로 규범을 생산하고 강제하는 욕망 기계가 되었다.

아론 슈스터는 <쾌락의 곤경>이라는 책에서 불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유태인 농담 하나를 들려준다. 러시아행 열차 칸에 한 여행자가 목마름을 호소하는 노인과 동승한다. 그 노인은 계속 아아, 목이 마르다고 소리친다. 그 소리를 견딜 수 없어 여행객은 노인의 목을 축여주기 위해 물을 사서 건넨다. 물을 마신 노인은 한동안 잠잠하지만, 계속 여행객의 눈치를 살피다가 갑자기 아아, 나는 목이 말랐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 농담이 보여주듯, ‘불평은 사적인 문제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기제라는 것이 슈스터의 주장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적인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농담에 등장하는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었다기보다 그 목마름을 계속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목마름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노인에게 지극한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평은 자기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설정하는 어머니가 바로 불평하는 존재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불평하는 존재프로불평러라고 부르고 조롱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기제인 불평을 사적인 성격이나 경향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냉소주의는 이데올로기를 비웃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냉소주의는 계몽의 피로감에 따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그 계몽의 결과를 회의하는 자기부정이 냉소주의를 이루는 핵심 원리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변해야 할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냉소주의의 논리다.

과거 학생들이 시위라도 할라치면 이른바 어른들불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높은 지위에 올라 그때 세상을 바꾸라고 조언하곤 했다.

물론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러한 주장 역시 냉소주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평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면, 객관세계의 변화는 불평이라는 기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불평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항상 구조적인 차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불평러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에서 불평에 대한 냉소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불평이라는 쾌락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히 불평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평자체라기보다, ‘불평할 수 있는 권리. 이 권리는 종종 권력과 동의어를 이룬다. 이른바 갑질은 이런 불평의 권리가 권력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는 불평할 수 있지만, 모두 다 마음대로 불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평등주의는 이런 사각지대를 과소평가한다. 부자와 거지는 원칙적으로 평등하지만, 구걸을 금지했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거지이지 부자가 아니다.

불평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우리 모두는 불평을 즐길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평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쥔 이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불평러는 불평등한 불평의 현실에 좌절한 이들이 만들어낸 풍자이다. 문제는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전제하는 불평하지 말자라는 금지의 규범이라기보다, 그 규범 너머에 있는 불평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불평등한 현실일 것이다. ‘땅콩 회항이나 라면 상무처럼 감정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불평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불평의 불평등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쾌락이 사실상 불평등한 조건의 산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 불평등성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논리다.

그러나 이 불평등성은 개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불평의 지속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은 축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목마름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순 없다. 욕망의 정치가 가진 양가성을 어떻게 변화의 에너지로 만들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천명한 브렉시트사태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때, 진보정치세력에게 닥쳐올 재난이 무엇일지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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