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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무역의 질투심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무역이 국제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제시한다. 인간의 합리성에 회의적이었던 흄은 경험적 지식의 축적을 신뢰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질투심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훌륭한 제도로 무역을 이해했다.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래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공정하게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시장의 정의였다. 정의야말로 개인의 경쟁을 파국에 다다르게 하지 않는 안전장치였다. 흄의 입장에서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도덕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보다 무역을 하는 것이 상호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을 때, 개인은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흄의 가설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흄의 말이지만, 요즘 듣더라도 크게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흄의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시장경제의 원칙으로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흄의 정치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정치의 정치론’은 경제를 정치의 목적으로 설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냉전시대의 한국에서 흄의 생각은 경제발전으로 전쟁을 막자는 구호로 변주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북한체제에 승리하려면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경제발전’이라는 대의명분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을 위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배반할 수 있는 예외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흄이 믿었던 무역의 호혜성은 실제로 개발독재라는 예외적 폭력을 통한 경제발전이 있어야 가능한 셈이다. 정치의 목적이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는 선에서 그쳐야한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일진대, 한국의 경우는 이런 원칙을 배반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

그동안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한국이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진보든 보수든 공통적으로 믿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정상국가를, 또 다른 쪽에서는 선진국을 국가발전의 목표로 삼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정상국가나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경제발전’이었다. 여기에 위배되는 것은 쓸모없거나 아니면 낭비로 받아들여졌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소홀하게 취급받던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안착과 함께 중요하게 대두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분위기에 저항하는 잔재가 없어지지 않았다.

한강의 기적에서 불 수 있듯이, 한국은 근대화를 위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이를 저해하는 민주주의는 사장되거나 배척받기 일쑤였다. (출처 : 경향DB)


최근에 떳떳하게 극우단체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등장한 일군의 집단들은 과거 냉전시대에 위력을 발휘했던 독재에 대한 향수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기에 역사의 후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국가와 국가주의가 서로 분리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다. 국가주의로부터 이탈한 국가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사회라는 집합을 통합하는 재현물이다. 이런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법이다. 독재자의 신민에서 법의 시민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시민과 비시민을 나누어서 전자의 안전을 위해 후자의 자유를 일정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합의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합의점을 찾은 것 같다. 이 때문에 과거같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 엄청난 문제로 비화되곤 한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리턴’ 사건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밖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그때는 통제를 할 수 있었지만, 이제 어렵다. 그 이유는 그만큼 ‘민주주의’의 감시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감시기능의 상당수는 시장을 통해 작동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는 시장의 총아가 없었다면, 이번 일도 별문제 없이 지나갔을지 모른다. 이런 감시기능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종북사냥’을 부추겨서 시청률을 올리는 것도 시장의 논리이지만, 이번 고교생 테러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만일 그 행위가 시장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흄의 가설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면, 이 경험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다.


이광택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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