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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은 정말 짜릿한 모험일 거야”라고 피터 팬은 말한다. 영국의 극작가 제임스 배리가 쓴 유명한 동화 <피터 팬>의 주인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모험에 빗대어 말하는 ‘어린이’ 피터 팬의 진실은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하지 않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사람의 팔을 잘라서 악어에게 던져준 것이나 후크를 사지로 몰아넣을 때 낄낄거리면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것이나 동화에서 그려지는 피터 팬의 이미지가 천사 같아야 할 동심에 부합한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원작을 윤색해서 만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피터 팬은 결코 순진무구한 ‘어린이’로 등장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세상 물정 모르는 웬디와 동생들을 꾀어내 가출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고 나면 절대 환영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피터 팬이다. 그러나 이런 피터 팬이야말로 어른이 만들어낸 인물 중에서도 가장 ‘어린이’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왜일까.

피터 팬은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는 인물이라기보다 ‘어린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는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른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어린이’가 전부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터 팬은 동심의 진실을 엿보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어른은 이 진실을 엿보고 싶을 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른바 ‘잔혹동시’ 논란이 그것이다.

언론에 소개된 동시들을 두고 10살 ‘어린이’가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에서 부모의 학대 혐의까지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고, 급기야 부모가 직접 나서서 출간 배경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견은 ‘엄마를 씹어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불쾌하다’는 성토에 가까웠다. 심지어 글쓴이의 ‘반사회성’을 거론하면서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등장했다. 이런 반응들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기 시작한 ‘정상성’의 규범을 여기에서 어렵지 않게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정상성’의 규범은 정상과 비정상을 분리해서 후자를 배제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과정은 과거에 인지되지 않았던 비정상적인 것을 규정함으로써 역으로 정상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비정상적인 것을 제거해버린다고 정상화가 자동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인류 역사에서 정상성이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해졌을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어떻게 보면 서로 공존하는 관계를 이룬다. 현실은 이렇듯 비정상성의 오염으로부터 정상성을 지켜냄으로써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다채로운 사물들이 서로 공존하는 세계이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가 수록된 시집 <솔로강아지>


‘잔혹동시’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상적인 상상을 벗어난 10살 ‘어린이’의 시는 이미 ‘잔혹한 것’으로 단정되어 버린다. 공존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해서 바라본다면, 우리의 판단은 쾌와 불쾌만을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특정한 사물을 쾌와 불쾌 둘 중 하나로 결정하게 만드는 ‘정상성’의 규범이다. 과연 이 규범은 특정 사회의 권력이나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역설적으로 이 규범이야말로 특정 권력과 계급의 산물이 아닐까. ‘어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정상성’이라는 규범으로 재단해서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 바라보려는 태도가 이번 ‘잔혹동시’ 논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최소한 이번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은 어른들이 여전히 ‘어린이’를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딸의 시를 읽고 그토록 싫어하는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는 부모의 결단은 분명 훌륭한 행동이었다. 이런 행동이 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출판이라는 공적인 차원으로 이행하자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갑자기 상황은 시를 쓴 ‘어린이’와 부모의 범위를 넘어서서 이제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단계로 넘어온 것이다. 피터 팬에 감춰져 있는 ‘잔인성’을 허용해왔던 우리 사회가 ‘잔혹동시’에 유독 민감한 까닭은 의미심장하다. 전자가 어른을 통해 ‘어린이’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후자는 ‘어린이’를 통해 어른에게 주어진 것이다. 순수한 동심’을 상상하는 어른에게 ‘잔혹동시’는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환기시켜준다. 이 외설적인 진실을 우리 정상적인 어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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