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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서울시민’을 대표한다는 어떤 분들이 박원순 시장을 ‘직권남용 및 공연음란 방조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고 한다. 고발 내용으로 적시되어 있는 ‘공연음란’이 무엇인지 봤더니 지난 6월28일 열린 ‘퀴어문화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서울광장은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하거나 혐오감을 주는 행위, 영리를 목적으로 한 광고 및 판매 행위, 취사행위, 주류 반입 행위 등을 못하게 돼 있다”는 것이고, 문제의 퀴어문화제에서 “동성애자들은 실오라기 같은 팬티 하나만 착용한 채 전신을 노출하는 등 성적 수치심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반하는 논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단 박 시장이 동성애와 관련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천명했다는 것, 그리고 고발인들이 제기하는 ‘공연음란’의 현장에 리퍼트 미 대사를 비롯한 각국의 명사들이 참가해 축하했다는 것, 따라서 박 시장이 행사를 방조했다거나, 행사 주최자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 그냥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서 문제적인 지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어떤 배제의 논리를 보여주는 예증이기 때문이다.


퀴어축제 찾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_경향DB


이 배제의 논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혐오의 감정에 근거하고 있다. 혐오라고 해서 다 같은 감정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 또는 외국인 혐오는 동일한 감정에 기초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가 기본적으로 민족국가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기동의 결과물이라면, 외국인 혐오는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선 국제화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한국처럼 여성 혐오자나 동성애 혐오자이면서 외국인에 대해 관대하거나, 반대로 여성과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이들이 외국인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도 감정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여성 혐오가 다분히 상대방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경멸의 감정에 기초한다면, 동성애 혐오는 역겨운 감정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미국의 법철학자인 윌리엄 이언 밀러는 혐오의 정서 중에서도 경멸과 역겨움을 정치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정 작용으로 본다. 경멸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고 한다면, 역겨움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관용에 대한 저항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경멸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개인의 자격에 대한 비난에 동의하지만, 역겨움은 관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감정기제인 셈이다. 따라서 여성 혐오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일정하게 소멸할 수 있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그 자체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나치가 동성애 혐오를 정치적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박 시장을 고발한 ‘시민’이 내세운 논리는 그 무엇도 아닌 ‘시민의 권리’였다. 시민의 재산인 서울광장을 동성애자들에게 대여해 공연음란행위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범법행위”를 방조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범법자들인 셈인데, 이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유는 간단하다. 범법자들로 규정하는 순간, 효과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시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릇 범법이라는 것은 시민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는 행위이고, 따라서 시민의 자격을 지키지 못한 이들은 결코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범법자는 역겨움의 대상이지 깔보고 업신여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표면상 박 시장에 대한 공격이지만, 사실상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조직해내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김진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반공이라는 대의가 사라진 조건에서 동성애 반대는 기독교 극우세력을 다시 결집하게 만드는 정치적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전복시키기 위한 ‘역겨움의 정치’를 전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공격 대상이 동성애자들이지만,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경멸의 대상이 점점 사라질수록 ‘역겨움의 정치’는 훨씬 다양한 양상으로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역겨운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면, 누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극우정치는 이런 강요된 침묵에서 움트는 것일 터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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