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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혐오에 대해 불행의 원인을 없애버리려는 자아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혐오라는 것은 일시적인 마음 상태라기보다 특정 대상에 대한 일관된 성향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혐오의 문제는 혐오라는 감정 자체에 있다기보다 혐오하는 대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가 ‘무엇’을 혐오하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이 문제는 그 ‘무엇’을 결정하게 만드는 규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규범은 어떤 것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누는 기준이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 기준은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혐오나 동성애혐오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대체로 여성과 동성애자는 소수약자에 속한다는 전제에서 이런 합의는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합의가 자명한 만큼 합의된 것 내부에 맹점이 있을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혐오는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열망의 산물이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없애려는 것은 당연한 심리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해지는 대신 상대방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이런 혐오의 행위는 연대에 기반을 둔 사회 전체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혐오라는 감정 상태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관용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미덕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일상에서 관용은 생각과 취향을 달리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일상의 차원을 벗어나서 정치적인 차원으로 넘어온다면 관용 역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으로 작동한다. ‘다름’을 관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이거나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규범화된 관용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일베를 중심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일베의 논리는 자신들의 호남혐오나 여성혐오를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난센스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런 현상들이 일베라는 특정 집단에 국한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상황은 사뭇 심각해진다.

이 문제를 ‘민주주의의 역습’이라거나 ‘우중정치’라고 개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관점 역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승자박의 논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객관적 조건으로 본다면, 지금 일베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소수약자에 대한 혐오조차도 관용해야 하는 극단적인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논리는 모든 사물을 공평한 차이로 환원시키는 형식적 평등주의이다.

앤디 워홀은 어디선가 자본주의의 평등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코카콜라를 1달러에 사먹어야 하는 평등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절반만 맞다. 무엇이든 교환이 가능할 때, 말하자면, 그 무엇이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등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비밀이다. 교환되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서 상품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이 평등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유족 농성장 앞에 모인 일베 회원들이 '피자를 먹는 폭식투쟁'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렇게 상품화로 포섭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불행과 같은 감정 상태일 것이다. 유명한 유태인의 농담을 상기해보자. 랍비와 부자가 교회에 들어가서 자신의 불행을 신에게 토로하면서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한다. 조금 있다가 가난뱅이가 들어와서 똑같이 신에게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면서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부자가 랍비에게 귀엣말로 “가난뱅이 주제에 감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고 비웃는다. 이 농담이 풍자하듯, 불행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불행은 사고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행의 원인을 박멸하려는 혐오의 감정도 평등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무엇을 왜 혐오하는지, 그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 판단의 기준은 평등주의 바깥에 있다.

일베 현상은 모든 혐오를 평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혐오나 동성애혐오나 호남혐오를 독재나 불평등에 대한 혐오와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무기력한 민주주의의 문제이라기보다, 모든 가치를 동등한 상품의 차이로 환원함으로써 권력과 구조의 문제를 지워 버리는 형식적 평등주의에 대응할 논리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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