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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어차피 완벽히는 할 수 없으니 요만큼만/ 뻥튀기는 하지 말자 그냥 나의 몸집대로/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가수 오지은의 ‘인생론’이라는 노래의 첫머리다. 요즘 20~30대의 감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이 노래에 담겨 있다. 물론 이 노래가 보여주는 ‘인생론’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현실은 꿈꾸는 것과 다르다고 ‘어른들’은 훈계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이런 훈계의 내용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지은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순진하게 꿈만을 담아 노래로 만들었을 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이들은 현실을 너무 잘 알기에 이런 노래를 ‘홍대 앞’에서 즐겨 부르는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모든 문화적 사건의 진행이 그렇듯, ‘홍대문화’가 예전 같지 않고, 지나치게 상업화되었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1990년대 이후 ‘새로운 문화’라는 것은 미우나 고우나 이 ‘홍대문화’에서 기원했고, 여전히 젊은 세대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오지은은 이미 이 노래에서 ‘체념의 기술’을 들려주고 있다. 자기계발의 강풍이 매섭게 몰아쳤을 때 다른 삶을 노래한 것이다. 너도나도 스펙 경쟁에 매진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젊은 세대가 마음 놓고 인생을 설계할 수도 없는 암울한 세상이었다는 개탄은 이제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 같다.
비로소 오지은이 부른 ‘인생론’이 젊은 세대의 귓전에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장기하의 ‘나는 별일없이 산다’가 자꾸 무엇인가 하라고 부추기는 세상을 향한 항변이라면, 오지은의 ‘인생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대답을 시도한다. 경쾌하면서도 소탈한 멜로디에 실려 그의 인생론은 심각하지 않게 젊은 세대에게 세상의 요구와 다른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알려준다는 생각이다.
대학생 만난 문재인 후보 (출처: 경향DB)
다음주 있을 대선 투표에서 중요한 변수는 20~30대 투표율이 될 공산이 크다는 평가다. 두 대선 후보 진영에서 젊은 세대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때문일 게다. 한 후보는 자신을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고 홍보하고, 다른 후보는 ‘새 시대 첫 대통령’이라고 내세운다. 두 후보 모두 부동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20~30대를 위한 대책을 쏟아내고 이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고자 한다. 일정하게 이런 노력의 효과는 선거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투표로 표현되는 존재감을 넘어서 젊은 세대를 독자적인 주체로 받아들이고, 사회적 몫을 인정해주는 것은 정책 공약을 통해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안철수 현상’을 촉발시켰던 원인이 멘토문화였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젊은 세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지은의 ‘인생론’이 노래하는 것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 문제는 ‘반값등록금’ 같은 파격적인 해결책을 제시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젊은 세대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오직 ‘예비노동력’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이른바 ‘알바생’이라는 명칭에 진실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학생’이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라는 임시직은 잠깐 머물다가 좋은 직장으로 옮겨갈 수 있는 ‘보류기간’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를 재편하기 시작한 경제논리는 이런 삶이 ‘임시’라기보다 ‘지속’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절대다수의 젊은 세대가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할 수 없음에도, 한국 사회는 계속 몇몇 성공사례를 내세우면서 스펙 경쟁을 조장하기에 바빴다.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체제로 편입해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자국의 잉여노동력을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은 자본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그 결과 ‘알바생’이라는 유휴노동력이 관리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현저하게 좁아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조언은 그 청춘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들에 국한해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자격은 알바생에서 관리계급으로 자신의 지위를 격상시킬 수 있는 ‘학벌’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비해 이 현상은 더욱 가속화했고,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노동력의 범주도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질적인 노동력의 범주가 무엇인지 논란거리이지만, 이런 전환을 통해 대학은 기업을 위한 ‘맞춤형 노동력’을 공급해야 하는 장치로 자리매김됐다.
기성 정치권은 20~30대에게 자신들이야말로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선택을 권유하지만, 이런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이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부족하나마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의사표현일 수 있겠다. 그러나 선택지가 없어서 체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인생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새로운 정치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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