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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소형 무인기 논란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이 민주국가나 법치국가라면 무인기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재치 있는 반응들이 잇따랐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대형 무인기로 군사작전을 펼치는 미국은 도대체 뭐냐는 촌철살인의 질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만행을 부각시키려다가 소형 무인기 논란에 대응하는 국방부 논리의 취약성을 드러내버린 꼴이다.

근대 이후에 민주나 법치를 자임하지 않는 국가도 없고, 군사작전을 수행하지 않는 민주국가나 법치국가도 없을 텐데, 국방부 대변인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풍자의 즐거움을 잠시 제쳐두고 살펴보면 국방부 대변인이 그처럼 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민주국가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여기에서 ‘그런 짓’이란 ‘평소에 무인기를 보내서 몰래 정탐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한마디로 ‘비겁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해프닝일 수도 있는 이 발언은 한국에서 ‘민주국가’ 또는 ‘법치국가’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처럼 보인다.

일차적으로 이 용어가 도덕적으로 옳거나 좋다는 의미인 것은 확실하다. 말하자면, ‘민주국가’와 ‘법치국가’는 옳거나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 옳거나 좋은 것을 의미하는 ‘민주국가’와 ‘법치국가’는 북한 같은 국가가 아니다. 북한은 ‘민주국가’도 아니고 ‘법치국가’도 아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소형 무인기를 날려서 타국을 정탐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북한은 상호주의 같은 보편적 규칙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이차적으로 이 용어는 북한과 반대에 놓여 있는 가치를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국가’와 ‘법치국가’라는 용어는 북한과 달리 보편적인 가치를 지시한다.

나란히 놓인 무인기들 (출처 :경향DB)


이처럼 ‘민주국가’나 ‘법치국가’라는 말은 ‘우리는 북한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안티테제인 것이다. 국방부 대변인의 발언을 생각 없는 말실수로 치부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오히려 그는 충실하게 북한에 대한 국방부의 생각을 문자 그대로 ‘대리’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국방부에 ‘민주국가’나 ‘법치국가’는 북한에 반하는 국가를 뜻한다. 북한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서 민주와 법치의 의미가 결정되는 셈이다.

이런 민주와 법치의 개념은 북한이 없다면 존립할 수 없는 가치이다. 한국에서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는 안보의 논리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안보의 논리는 오직 북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민주주의나 법의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소형 무인기 때문에 최신형 레이더를 졸속으로 구매하겠다는 발표를 보더라도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느낌이다.

북한의 행동은 예측불허라는 점에서 언제나 예정된 돌발변수이다. 돌발변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에 대처하는 예측가능한 행동이 중요할 것이다. 그에 대처하는 행동마저 돌발변수라면 안보의 논리도 무색해진다. 게다가 북한을 전제하지 않고서 민주나 법치의 의미마저 독자적으로 정립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국가기관을 관리하고 있다면 최악이다.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비슷한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던 이들이 내세웠던 논리가 북한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들에게 민주나 법치는 북한만 반대하면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은 북한만 막는다면 민주주의의 선거원칙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더 나아가서 북한을 막는 것이 민주주의의 선거원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독재자도 자신을 법치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은 적이 없고, 어떤 독재국가도 민주국가를 표방하지 않은 적이 없다. 심지어 북한조차도 자신들의 호칭에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갖다 붙인다. 북한을 핑계로 안이하게 민주와 법치의 내용을 정립할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났다. 한국에서 진보만 혁신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도 좋았던 그 과거의 습속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시대착오적인 북한과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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