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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현상’은 이제 민주당과 하나가 됨으로써 다른 단계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윤여준 전 장관의 지적처럼, 어떤 현상에 개인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드물다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아무런 정치적 배경도 없던 ‘안철수’라는 인물을 유력한 정치인으로 등장하게 만든 과정은 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라는 개인은 한국의 상황에서 낯선 것이긴 하지만, 이미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구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한국은 그 과정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식습관이 서구화하면서 이른바 ‘선진국형’ 성인병이 우리에게도 발생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의회정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긴 이들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당이 조변석개를 밥 먹듯 한다면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회의 목적이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면, 이런 정당의 이합집산은 조밀한 의견수렴을 통해 정교하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정치를 방기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파괴하는 것처럼 비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의회정치의 위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심화되었고, 이제 정치는 정당보다도 개인의 명망에서 더 신뢰를 확보하는 상황으로 변화했다. 이념을 상실한 정당과 시장의 진리를 정치에 강제하는 경제주의의 여파는 정치 자체를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배제했고, 그 결과 정치인 개인의 명망 이외에 어떤 것도 신뢰를 주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당이 아니라 인물이 중요해진 것이다. 한국의 정치 현실도 이런 진실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전시장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옷 갈아 입는 김한길-안철수(출처 : 경향DB)


말하자면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치인이나 ‘국민’의 의식이 후진적이어서 나타났다기보다, 오히려 제대로 된 의회정치의 경험을 가질 수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더 보편적인 정치의 양상으로 출현한 것에 가깝다. 정치에 선진과 후진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안철수 현상’에서 중요한 것은 ‘안철수’라기보다 ‘현상’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엘리트의 권력분점지형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현재의 의회정치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반대로 ‘안철수’이다. 왜일까. 권력엘리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철수’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자신의 영역에 넣어줄지 말지 이게 관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상황은 이제 권력엘리트들끼리 지분을 나눠먹는 것을 ‘선진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 변화는 일방적으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민주당 내에서 ‘안철수’라는 명망의 정치인과 각을 세우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이런 정치의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세력이었다. 모바일투표를 근간으로 삼는 개방형 국민경선을 민주당에 도입한 이들이다. 이 국민경선 덕분에 2002년 당시 미미한 당내 지지율에 머물던 ‘노무현’이라는 또 다른 명망의 정치인을 대선 후보로 선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런 국민경선이야말로 정당의 존립근거 자체를 되묻게 만드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한다면 해당 정치인의 정당 내 영향력이란 것은 무의미해진다. 의정활동에 충실하면서 정당에 집중하면 정치적 명망이 약화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 정치인들이 대거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논란이 되었는데, 이 또한 명망의 정치가 만들어낸 풍경들이다. 정당 내에서 지분을 확보하려면 명망이라는 상징적 자산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양심’이나 ‘의식 수준’만을 탓하는 것은 별반 생산적이지 않다. 분명한 것은 지금 코앞에 펼쳐지고 있는 정치는 몇몇 몰상식한 정치인 탓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이다. 개인은 실패할지언정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라는 체제이다. 정치인은 공식적으로 민주주의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국민’의 총의는 대표성보다 크다. 이 총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압박했던 것이 과거 민주당의 정당성이었다. 이 정당성을 ‘정통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선출된 권력이 되는 순간 민주당도 마찬가지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의회정치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 ‘현상’을 개인의 이름에 머물게 할 것인지 아니면 정치 변화의 에너지로 바꿀 것인지 언제나 이것이 문제인 셈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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