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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실을 빗대 부르는 ‘헬조선’ 또는 ‘지옥불반도’라는 말에서 어떤 정치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봇물을 이루는 것 같다. 바야흐로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시도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통계적으로 청년이 야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고,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불만이라면 무엇이든지 동원해야 하는 기성 정치권으로서 청년세대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헬조선’ 현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하는 것까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근거로 지금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불만이 극에 달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진단은 어딘가 석연치 않을 뿐만 아니라 충분하지도 않다. 특히 ‘헬조선’을 ‘헤븐조선’으로 만들기 위해 청년들이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식으로 구태의연하게 늘어놓는 ‘어르신들’의 설교는 왜 지금 청년세대가 다른 수많은 비판적인 표현을 두고 한국의 현실을 비꼬아 ‘헬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기성세대의 오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이런 움직임은 사실상 청년세대를 대상화해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얻는 일이라면 결과야 어떻든 일단 지르고 보겠다는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는 징후에 불과하다. 솔직히 ‘헬조선’이라는 말은 이런 가식적 제스처 자체를 조롱하는 표현에 가깝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에서 중요한 의미는 ‘헬’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숨어 있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기성세대는 ‘헬’의 뜻을 되새기지만, 사실상 ‘헬조선’은 한국이 전근대적이었던 조선처럼 후져서 헬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럼니스트 박권일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헬조선’은 ‘미개’라는 말과 쌍을 이루는 말이다.

‘헬조선’에서 작동하고 있는 프레임은 ‘진보 대 보수’라기보다 ‘문명 대 미개’이다. 한때 한국에서 진보세력에 의해 보수세력은 ‘미개’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헬조선’에서 진보세력은 또 다른 ‘미개’로 분류되고 있을 뿐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과거의 냉소주의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냉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미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냉소주의라고 할 수 있다.

헬조선_경향DB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가 분석했듯이 현대의 냉소주의는 “계몽된 허위의식”이기 때문에 계몽의 전통 자체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고 있다. 계몽의 이중성에 근거한 이런 냉소주의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허위라고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지탱된다. 그러나 지금 유행하고 있는 ‘헬조선’의 논리는 이런 냉소주의의 역설을 한 번 더 뒤집어 놓은 것 같다.

‘헬조선’은 ‘죽창’이라는 저항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허위를 방패로 삼는 냉소주의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신의 삶에 닥친 조건들이 ‘노오력’만으로 극복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른바 ‘수저론’은 이런 불가항력적 물질성을 표현하는 수사라고 볼 수 있다. ‘헬조선’은 정치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헬조선’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문명’을 찾아서 ‘탈조선’하거나 아니면 ‘미개’를 끝까지 밀어붙인 ‘죽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헬조선’의 논리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아시아에서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대화의 논리에서 ‘헬조선’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회다윈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역사를 민족 간의 약육강식으로 설명했던 근대 아시아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조국은 말 그대로 ‘헬’이었다. 역사를 이렇게 진화의 문제로 파악하는 순간, 돌연 정치는 소멸하고 자연 상태의 생존경쟁만이 중심 문제로 남게 된다. 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오직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사실 정치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이런 ‘먹고사니즘’의 악무한일 것이다. 정치는 생존경쟁에 빠져 있는 삶을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이다. 지금 ‘헬조선’이라는 말에 들씌워져 있는 ‘문명 대 미개’라는 프레임을 ‘진보 대 보수’의 대결로 바꾸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과연 이런 ‘사건’이 이번 선거철에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정치인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더 이상 국민을 탓하면서 수준 낮은 정치를 비난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이미 한국은 충분히 ‘헬’이다. 한국이 ‘헬’인 이유는 국민이 ‘미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더 이상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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