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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페루에서 국가폭력, 학살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아야쿠초’라는 마을 이름이 보였다. 리마에서 꽤 떨어졌고 더 가면 마추픽추다. 민박 주인이 왜 마추픽추에 안 가냐 했다. 이미 알아버린 이름, 아야쿠초 때문이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나섰다.

버스가 밤새 달려 아침 무렵 아야쿠초에 다다랐다. 한 건물 바깥벽 그림이 눈에 띄었다. ‘기억박물관’이다.

3층 전시실에는 희생자 생전 사진, 마지막에 입은 옷, 학살 현장 사진, 그림, 조형물, 한 여성이 “왜 내 아들을 죽였는가?”라고 쓴 팻말을 든 사진, 부모나 형제자매를 잃은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 진실을 밝히려 20여년 투쟁한 여성들의 사진, 지나온 과정 기록이 있었다. 담당자한테 설명을 듣다 왈칵 울었다. 여자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떨어져도 사람은 이어졌다.

십년 뒤, 한국·안산·고잔동에서 ‘416기억저장소’와 ‘416기억전시관’을 본다. 부서진 304명의 꿈이 생명을 존중하는 세상으로 피어나게 ‘기록하고 기억하며 행동’ 하자 한다. 지난주 금요일, 상가건물 3층 416기억전시관 전시실에서 단원고 2학년 2반 김수정 아빠가 시를 읽었다.

“수정아, 보고 있니?/ 아빠가 네 얼굴을…” 1연 2행 한가운데서 소리가 뚝 멈춘다. 앞에 선 아빠도, 바닥에 앉아 듣던 사람들도 모두 침묵에 갇힌다. 긴 침묵을 함께 견딘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들었을까. “아빠가 네 얼굴을 십자수로 떴어./ 하루에 9시간씩 11개월이나…” 가까스로 이은 시가 다음 행에서 다시 끊긴다. “…십자수 바늘을 붙들고 있었어.” 남은 행과 연을 아빠는 포기하지 않고 다 읽었다.

기억시 낭송문화제 ‘금요일엔 함께하렴’은 지난 9월23일에 시작해 내년 4월14일까지 금요일마다 오후 7시에 열린다. 2주나 3주에 걸쳐 한 반씩 아이들을 시로 읽고 만난다. 교사 모임 ‘교육문예창작회’ 작가 35인이 단원고 학생과 교사의 삶을 시로 썼다.

“3년 가까이 되는데 진실이 밝혀진 게 없다. ‘이제 그만 하지’라는 말을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딸 하고 약속한 게 있다. ‘네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겠다.’ …딸과 한 약속을 지켜서 이 나라가 반듯하고 안전한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번째 금요일에 1반 유미지 아빠가 한 말이다. 유가족 이야기, 진상규명·세월호 인양 이야기, 안산 주민 이야기, 가수의 노래 순서도 있다. 다른 이의 말과 시, 노래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난다. 8반 이재욱 엄마는 “기억시 낭송이 하나의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화가 홍성담 그림 전시회 ‘들숨ː날숨’도 함께한다. 참사 1000일인 2017년 1월9일까지 전시한다. 유가족이 안내원, 도슨트로 시민과 만난다. 단체로 관람을 올 때는 미리 연락을 주면 좋다. 1반 한고운 엄마가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20분’이라는 그림을 말한다. 세월호가 110도 기운 시각, 그림 속 아이들은 흰 눈물을 흘리며 가라앉는 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저 아이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저 아이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 사랑했던 엄마 아빠,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얼굴입니다. 그날, 해경들은 구조를 위해 달려왔지만 저희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제일 먼저 선원들만 구조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바다 속에 잠겨서 하나둘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7반 허재강 엄마가 목단 가득 핀 그림 ‘내 몸의 바다2’ 옆에서 화가가 한 말을 전한다. “그 마지막 물고문 학살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직면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유가족이 먼저 용기를 갖고 직면을 하게 된다면 국민들도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을 대면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생명의 귀중함을 알게 되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만이 제2의 세월호 학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엄마들이 눈물을 삼키며 그림을 설명하는 이유다.

세월호, 안산, 고잔, 단원고…, 이미 당신이 알아버린 이름. 사진과 영상은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길을 나서보자. 416기억전시관에서, 그림과 시와 말 사이에서 곰곰 오늘을 만나자. 안내하는 이의 설명을 듣다 왈칵 울어도 된다. 발걸음이 이어지면 진실규명에 힘내자, 함께하자는 응원이 되리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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