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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장맛비가 시작되었으나 지난주까지만 해도 가뭄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밭에 물 주는 일이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이었다. 물은 농사에 절대적이다. 건강한 흙에 물만 있으면 작물에 필요한 영양분을 다 만들 수 있지만 물 주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물은 아침과 저녁에 줘야 하고 뜨거운 낮에 주면 도리어 농사에 해로울 수도 있다. 물도 아무 물이나 주면 안된다.

밭에 물을 주다가 갑자기 송곳이 필요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뚫린 구멍으로 물을 흘리는 ‘점적호스’의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 나와서다. 철물점에 가면 1000원에 송곳 두 개를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은 사지 멀쩡한 농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 직접 만들기로 했다.

특히 최근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를 다 읽고서 사피엔스의 지위가 간당간당한 현대인이 더욱 분발해서 손과 발을 많이 사용해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던 터라 인류의 미래까지 생각하는 의무감을 갖고 송곳 만들 연장을 챙겼다.

점적호스를 쓰지 않고 이전처럼 아침저녁으로 일반호스를 들고 농장 여기저기를 다니며 물을 준다면 송곳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랫동네 사과농장에서 철거한 점적호스를 버린다기에 얻어 와 아침저녁만이 아니라 종일 규칙적으로 밭에 물을 주겠다는 생각에 이것을 설치했다. 그런데 구멍이 막힌 게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우리 농장은 지하수가 아니라 골짜기 물을 끌어다 쓰는지라 물속의 부유물들이 점적호스의 구멍을 막았을 수도 있다.

송곳 만들기는 엄지 굵기의 나무토막 하나를 골라 한 뼘 길이로 자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나무토막을 세워서 한가운데에 중간 크기의 못을 박았다. 송곳을 만들어 본 사람들은 그다음 순서가 뭔지 알 것이다. 못의 대가리를 벤치로 잘라내고 그라인더로 뾰족하게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무토막을 거꾸로 세워서 못 대가리를 바닥의 돌에 대고는 아까보다 좀 가는 못을 반대쪽에 하나 더 박았다. 두 개의 송곳을 만들려는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굵기가 다른 송곳이 필요한데 아직 양쪽에 다른 굵기의 송곳 못이 박힌 것은 본 적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양쪽의 못 대가리를 잘라내고 끝을 그라인더로 갈아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쪽 못이 휘어졌고 그걸 망치로 바로잡는데 나무 자루가 쪼개져 버렸다.

조금 더 굵은 나무토막을 준비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서 정교한 쌍송곳이 만들어졌다. 밭으로 가서 작물 위치에 따라 점적호스에 두 가지 다른 굵기의 구멍을 뚫어서 물을 흘리니 물이 아주 잘 나왔다.

계곡물은 부유물 때문에 호스 구멍이 막힐 가능성은 있지만 미생물과 유기물 함량이 높아서 관정을 뚫어 전기로 퍼올리는 지하수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다. 지하수보다 자연압을 이용해 지표수를 쓰는 것은 에너지 자립농사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작물의 영양 면에서도 몇 배 이롭다.

밭에 고랑을 내고 물을 대면 고랑 따라 물이 흘러들 것 같지만 우리 농장은 쟁기질과 로터리 치기를 하지 않는 자연재배 농장이라 그렇게 해서는 물을 댈 수가 없다. 땅이 스펀지처럼 푹신푹신하고 완벽한 떼알구조(입단구조)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계곡에 작은 보를 만들어 호스 끝을 담근 취수장을 만들었고 집수 부위로 부유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가는 철망을 덧댔다. 돈으로 따지면 송곳 하나 만드는 데 한나절이나 걸렸으니 비경제적이라 하겠지만 노동은 벌이의 수단만이 아니기에 송곳 하나 만든 내 한나절이 흡족하다.

자존감과 건강 향상, 자연물과의 직접 접촉에서 물리성 익히기. 이런 것들은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 쓸 때 받는 보너스들이다.

전희식 농부, ‘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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