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식구들 먹을 만큼 푸성귀며 잡곡 따위를 길러 먹는 작은 밭이 있다. 이웃 할매가 매실나무를 심어 놓았던 밭인데, 그것을 마치 물려받아 농사짓듯 밭농사를 시작한 게 다섯 해쯤 되었다. 밭이 생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빼곡히 심은 매실나무를 얼마간 베어내서 채소나 곡식 농사 지을 자리를 마련한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밭머리나 밭가로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일나무를 심은 일이었다. 해마다 한두 그루씩 더 심어서 이제 밭에 있는 과일나무만 해도 매실, 앵두, 자두, 복숭아, 살구, 사과, 감, 석류, 다래, 모과, 유자. 그러니까 늦봄, 앵두를 훑어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겨울 유자가 날 때까지 밭에 있는 한두 그루에서 열리는 열매만으로도 한 해가 간다. 아이들은 으레 밭에 가면 무엇 따먹을 것이 없는지부터 살핀다. 귤이나 한라봉 같은 것, 섬진강가 배밭에서만 자라는 맛있는 배. 그리고 포도. 이 정도가 돈을 주고 사먹는 과일인 셈.

처음에는 밭에 포도나무도 심었다. 그랬다가 잘 가꾸지 못해서 포도나무는 죽고야 말았는데, 그 무렵에 전국의 숱한 포도 농가에서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마트에 가든 수입 포도가 한 해 내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포도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특히 올해에는 아주 많이 베어낸다고 한다. 농민들이 제 손으로 심어 가꾼 나무를 베야 한다. 밭에 나무를 심을 때, 나무모는 그저 작대기에 뿌리 한 움큼 달려 있는 모양새다. 가지도 하나 없고, 무슨 나무인지 가려내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어린 나무를 심는다.

나무 막대기 드문드문 꽂혀 있는 것 같은, 그런 것을 적어도 몇 년 꼬박 애써서 가꾸어야만 그제서야 열매가 열린다. 과일 농사는 그래서 심은 나무와 함께 십 년, 이십 년 세월을 함께 겪으면서 짓는다. 어린 나무모가 뿌리를 내리면 그 후로 몇 십 년 자기 삶도 나무를 따라간다.

포도를 기른 땅에서 나무를 베어낸 농민들은 이제 복숭아나 자두나 사과 같은 나무를 심을 작정이라고 한다. 새로 심는 나무가 많다니까, 몇 해 지나 열매를 거둘 때쯤에는 다른 한쪽에서 다시 나무를 베어내는 집이 늘어날 테지. 올해 여기 악양에서는 매실나무를 베는 집이 여럿 있었다. 당장 나무를 베지 않았더라도,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매실나무를 어찌할 것인지 걱정이 한 짐이다. 모내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나무에 매달린 채로 누렇게 익었다가 떨어져 버린 매실이 어디에서나 발에 밟혔다. 어느 할배는 며칠 꼬박 매실을 따서 몇 천 원을 받았다고 했고, 농협에서는 자잘한 것이 섞이면 아예 수매를 안 받겠다고 몇 번이나 방송을 해댔다. 우리집도 올해는 몇 집에 부러 전화를 걸어 매실을 보냈다.

“아, 여그 특산품이 이제 체리로 바뀌었네.” “네?” “벚꽃 필 때는 오렌지, 망고였잖어.” 봄 벚꽃이 필 때,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섬진강을 따라 벚꽃길. 올해 그 길에는 유난히 오렌지와 망고를 싣고 온 짐차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커다란 트레일러까지. 이웃들끼리는 농으로 “이제 섬진강 따라 오렌지, 망고 농사가 천지 삐까리이네” 했는데, 오렌지와 망고가 조금 시들해진 자리에 곧이어 체리가 들어왔다. 미국에서 수출하는 오렌지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나라가 우리나라라니까, 오렌지는 전국 어디서든 가장 흔해빠진 과일이 된 지 오래다. 여기 지리산 자락 섬진강가 마을에서도 그렇다.

매실나무를 베어낸 땅에, 무엇을 다시 심으면 좋을까. 지금은 아무것도 마땅하지 않다. 그렇다고들 한다. 동사에서, 구판장 앞에서, 어른들 모인 자리 어디에서든, 다들 별 말이 없다.

얼마 전 통계청은 귀농과 관련된 통계를 발표하면서 “나도 농촌에서 한 번 살아볼까?” 하더니, 이 여름을 열대 과일과 함께 보내달라고 “열대 과일아~ 여름을 부탁해!”라며 해맑은 인사를 했다. 올여름 자몽 열풍이 기대된단다. 정부가 나서서 권하는 자몽을 앞에 놓고, 농민들이, 오래된 과일나무를 베어내고 있다.

전광진 상추쌈 출판사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