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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여행기에서 똑같이 말하는 것은 낯선 풍경과 처음 보는 사람들,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나 실수, 장엄한 자연 앞에서 압도되던 기억이나 이색적인 문화체험, 때로는 함께 간 일행들과의 소소한 불화 때문에 겪은 마음고생까지 즐거운 추억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하룻밤 이틀을 함께했던 스물두 명의 사람들이 크게 만족했던 이번 여행은 좀 달랐던 편이다.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폭염이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아 무척 더웠는데 우리는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잤다. 방이 두 개 있는 마을회관에서 잤는데 방은 두 개지만 여자들이 자려 했던 방이 너무 작아서 일부는 큰 방에서 남자들과 같이 자야 했고 샤워도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밥은 음식점에서 사 먹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직접 했고 국도 끓이고 반찬도 조리했다. 주방은 당연히 날씨보다 더 더웠다. 

밥을 안 사 먹는 것은 물론 페트병 생수를 단 한 병도 사지 않았으며 물컵과 수저, 개인용 접시까지 다 각자 챙겨 가기로 했던 것은 우리가 조금만 사려 깊게 살펴보면 주변 천지가 일회용품들로 환경오염이요, 유기화학 화합물이요, 수입 농산물이요, GMO 가공식품이요, 생활 화학재들이어서다. 폭염과 옥시 사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생수 페트병은 여행 갈 때는 물론 토론회 등의 행사에 별 생각 없이 개인별로 나눠 주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데 반쯤 먹다 남은 비싼 생수가 빈병과 함께 한순간에 다 쓰레기로 둔갑하는 현실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다.

마을회관에 이불이 없으니 각자 이불을 하나씩 가져오라는 알림을 듣고 겉으로 드러낸 사람은 없었지만 불평이 나올 만도 했다. 차라리 회비를 더 걷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숙박 여행을 가서 술 한 방울 못 먹는 경우는 60평생 처음이라며 미리 주최 측에서 술을 안 준다고 했으면 사 왔을 것이라고 불만 섞인 농담을 했다. 자기가 먹고 마실 것을 가져오라 했지만 여행을 주관하는 단체에서 설마 술을 준비하지 않기야 하겠느냐는 상식적인 믿음이 깨졌던 것이다. 

참석자들이 가져 온 농사지은 여주차와 사과즙, 연잎차가 있었지만 여행지에서 술 한잔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분들조차 술이 없어서 다음날 아침이 너무도 상쾌했다고 했다. 다들 일찍 일어났고 ‘고음실 마을’의 농촌 길을 산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부족함과 불편함을 새로운 경지와 접촉하는 발판으로 삼았고 단지 내 맘에 안 들 뿐, 상대는 늘 최선을 다한다는 그 믿음을 유지하는 여행을 계속했다.

‘문호리 리버마켓’ 장터에서는 땡볕을 얇은 천막 하나로 가리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예정대로 긴 시간 동안 장터 운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또 농부들이 직접 만드는 자율적인 장터를 염두에 두고 토론했다. 문호리 리버마켓은 요즘 유행하는 협동조합을 훨씬 뛰어넘는 체제로 보였다. 좌계 김영래 선생이 오래전부터 연구해 온 동아시아 고대 장터인 ‘호혜시장과 신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필요 이상의 축적을 금하며 잉여를 공동체로 환원하는 시장. 개인의 자유와 자율이 사회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배달화백’ 체제 말이다.

‘고음실 마을’에서도 최성현 선생의 자연재배농장에서 강의보다는 대화를 했다. 마을회관에서 강의라 할 만한 것이 있긴 했지만 통상적인 강의가 아니라 참석자들 중 아홉 분이 나서서 생각이나 주장보다는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미리 신청을 받아 진행한 ‘10분 발표’였다. 처음에는 ‘10분 토크’라고 했다가 토크라는 남의 나라 말을 ‘발표’로 바꾸었다.

여행은 ‘습관화된 나’를 벗어나 새로움을 찾는 것이리라. 새로움은 외부 환경과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재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리라. ‘농민 생활인문학-닦음과 행함’에서 한 여행이었다.


전희식 | 농부, ‘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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