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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60대 초반 정도 되는 장사꾼이 물건을 판다. “이 매트로 말할 것 같으면….” 열심히 선전을 했지만 아무도 사는 이가 없다. 그런데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노인네가 버럭 큰소리친다. “왜 여기서 물건을 팔아?” 80대로 보이는 노인네는 시커먼 물을 들인 군복에 해병대 모자를 쓰고 있다. 왼쪽 가슴에 명찰이 붙어 있다. ‘국가 유공자.’

장사꾼이 쳐다본다. 노인네는 다시 소리친다. “뭘 쳐다 봐? 여기서 팔지 말란 말이야!” 장사꾼이 힘없이 대꾸한다. “저도 먹고살려고 그래요.”

“어디서 대들어? 엉? 이걸, 고발하겠어.” 노인네가 벌떡 일어나더니 장사꾼 손수레를 잡는다. 어떤 아주머니가 “할아버지, 고만하세요. 놔 주세요. 먹고살려고 하는 걸 뭘 그러세요” 하고 말린다. 노인네는 나라를 구하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손수레를 양손으로 꽉 움켜잡고 있다. 장사꾼이 손수레를 빼내려고 하는데 그 노인네가 “이게 어디서 덤벼? 내가 누군지 알아?” 하면서 장사꾼 목을 조른다. 참다못한 장사꾼도 노인네 멱살을 움켜쥔다.

어떤 젊은이가 나섰다. 붙어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갈라놓더니 노인네를 지하철 문 옆 구석으로 모셔(?) 놓는다. “아저씨, 얼른 가세요.” 장사꾼이 내리자 역무원들이 왔다. 노인네는 역무원들한테 지하철에 왜 장사꾼을 들이느냐고 고성을 지른다. 역무원들이 “네, 네,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역무원이 돌아간다.

노인네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장사꾼 욕을 한참 퍼붓는다. 그다음은? 뻔한 스토리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6·25 때 자기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자랑을 한다. 목소리가 연예인 강호동 톤보다 높다. “내가 6·25 때 이 나라를 구한 사람이야. 목숨을 바쳐 이 나라를 살렸단 말이야. 부상도 당했어. 이걸 보라고. 이걸.” 시커먼 군복을 들쳐 배에 난 총상을 보여 주면서 자랑한다. 민망하다.

“죽을 뻔했어.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때문에 이 나라가 산 거야. 전두환은 내 2년 선배지. 난 이 세 분을 존경해. 난 이분들이 시키는 대로 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쯔쯔, 나쁜 짓은 다 했네. 박정희, 전두환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알 만하다.” 내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큭큭 소리를 죽이면서 웃는다.

6·25전쟁을 겪은 군인들 가운데 대체로 저런 꼴통 보수는 늘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힌다. 내가 어릴 때 집에 와서 돈을 뜯어가던 상이군인들이 있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상이군인들은 먹고살 게 없어서 그랬는지, 산동네에 지은 무허가 집을 찾아다니면서 깡패처럼 돈을 뜯어갔다. 갈고리 의수를 했거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상이군인 두세 명이 몰려다니면서 ‘무허가 집을 지었으니 돈을 내라고 요구했다. 돈이 없다고 하면 상이군인은 천막집을 들어 부숴 버렸다. 착하고 순진했던 어머니와 어린 나는 무서워 울기만 했다.

6·25 참전군인들 일부는 이렇게 더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고 살았다. 그런 이들이 지금은 대개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네 같은 ‘꼰대’가 돼 있고, 일부는 ‘가스통 할배’ 같은 꼴통 보수가 돼 있다. 이들은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 현장에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나타나, 때로는 가스통에 불을 붙여 상대를 제압하려 한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라’는 군인 정신(?)으로 완전무장된 사람들이다. 가스통 할배들은 자신들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의 피해자들이었던 사실도, 독재 정권을 유지하게 만든 기둥(?)으로 살아왔다는 사실도, 국가와 수구 세력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래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이 나라를 구했어, 내가 이 나라를 살렸어” 하고 앵무새처럼 내뱉는 꼴통 보수 꼰대들에게 내지르고 싶은 말이 있다.

“할아버지, 목숨을 걸고 구한 나라가 지금 이 꼴이에요? 이게 잘사는 거예요? 할아버지, 아들딸, 손녀, 손자들 있나요? 혹시 비정규직 노동자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이 나라를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할아버지 같은 꼴통 보수가 나라를 망치고 있어요.” 차마 이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있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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