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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끓인 커피는 식기 마련이고 피라미드도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저 하늘의 별들도 수명이 다하면 장렬히 빛을 내뿜으며 사라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구’라는 별도 50억년 후엔 멈추거나 파괴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주 안에 ‘시간’이라는 괴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은 활에서 당겨져 날아가고 있는 화살처럼 돌이킬 수가 없다. 과거로 돌아갈 줄 모르고 미래(未來)라고 부르는 미지의 경계를 향해 만물을 강제로 진입시킨다.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과거’라는 기억뿐이다. 이 ‘과거’라는 기억은 10년 전이나 하루 전이나, 혹은 이 글을 읽기 시작한 1분 전도 지금(至今)이라고 불리는 한순간(瞬間)일 뿐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찰나(刹那)다. 흔히들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을 한다. 찰나는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하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찰나마다 생겼다 사라진다고 가르친다.

우주는 137억년 전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10만분의 1초의 찰나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부터 터져 해일처럼 사방에 퍼지더니 물질, 에너지,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우주가 생성되었다. 빅뱅은 137억년 동안 수천억개 이상의 은하수를 우주에 수놓으며 계속 팽창한다.

왜 빅뱅이 일어났을까? 인간은 우주가 생성된 맨 처음을 저마다 상상해왔다. 여기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온 한 전쟁 피란민이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 지식인이자 사제였다. 그에게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이 건축했다는 예루살렘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신전이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천상의 장소라는 의미로 ‘시온’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농업의 순환에 맞추어 절기를 만들어 지킨다. 신은 1년 단위로 삼라만상을 열친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순식간에 지고 말았다.


기원전 6세기 어느 날,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뒤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유대 지식인은 깨달았다. 신은 장소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바빌론이라는 낯선 땅으로 잡혀와 하염없이 흘러가는 유프라테스 강을 한참 보았다. 매일 밤 어김없이 떠올라 검푸른 밤하늘을 수놓는 압도적이면서도 신비한 별들과 달에 넋을 잃었다. 이 천체들은 계절에 따라 가장 적절한 시간에 어김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우주의 처음을 상상했다. 그의 이야기는 성서의 첫 번째 책 ‘창세기’ 1장에 등장한다. “태초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라고 흔히 번역한다. 이 첫 구절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처음이란 순간을 통해 신이 혼돈 상태의 우주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다”라고. 혼돈에서 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처음’이란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다. 이전에 습관적으로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과는 다른 충격적이면서도 압도적이어서 전율을 느끼게 하는 문지방이다. ‘처음’은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137억년 전의 빅뱅과 같은 순간이다. ‘처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등장한다. 새로운 경험은 한순간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37억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아직도 팽창하듯이 매순간 처음을 유지해야 한다.

처음이란 무엇인가? 작년과 다른 올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어떻게 내가 잡을 것인가?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피상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창조하다’를 ‘점점 불어나다, 자라다’라는 의미를 지닌 ker-이란 어근에서 찾았다. 영어 ‘크리에이트(create)’, 라틴어 ‘크레아레(creare)’, 고전 그리스어 ‘크레초(kritzo)’ 모두 이 어근에서 파생했다. ‘창세기’ 1장을 저술한 유대학자는 ‘창조하다’를 ‘바라(bara)’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한다. ‘바라’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이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히 제거하여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든다.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다.

그 유대 지식인은 양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선 일상에서 벗어나 그 일상을 새롭게 관조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일년 단위가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일상으로부터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시키는 행위를 ‘안식일’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사바스(sabbath)’는 원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본래 의미는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2016년이 벌써 7일이나 지났다. 하던 일을 멈추고 처음을 경험해야겠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이 내가 목숨을 바칠 만한 일인가? 아니라면 과감히 잘라내야겠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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