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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근하는 곳은 서울의 어느 종합병원 재활센터이다. 난 이곳에서 9년 넘게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환자들을 치료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이들의 사고 경위와 생활 수준은 각양각색이다. 등산 중 낙상사고, 다이빙 사고, 갑작스러운 뇌혈관 질환 등으로 장애인이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재활치료에 임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수준 또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직 대학교수, 비정규직 노동자, 중국교포 등이 치료를 받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의 생계수단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낭떠러지에 맞닿아 있다. 결혼 후 가정을 꾸려 행복한 생활을 잠시나마 영위했던 이들의 앞날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위장이혼까지 결심해야 했으며, 연세가 지긋한 남편을 간병하느라 아내의 몸은 점점 골병이 들고 있다. 자식들은 편찮으신 부모님의 병원비, 간병비를 부담하느라 형제들 간의 충돌도 감당해내야 한다. 이런 아픔의 장소에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했다. 나 또한 지치고 피곤한 일상이지만 직업적 사명의식 없이는 이들을 대하기도 어려운 의료 현실 속에 몸을 던진다.

팍팍한 삶이 지속되던 2012년 겨울 대선 공약에서 너도나도 의료비 부담 경감, 복지국가를 외치며 선전전을 펼쳤다. 보편적 복지를 외치며 대선주자로 나선 문재인 후보에게 질세라 박근혜 후보도 비슷한 프레임으로 맞불을 놓았다. 4대 중증질환의 전액 국가 부담이 그 골자였다. 실제로 박근혜 후보의 대선 공약집에는 4대 중증질환의 비급여 진료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2013년 2월 인수위 보도 자료를 보면 4대 중증질환의 비급여 항목은 애초에 대선 공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가장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던 상급 병실료, 선택진료비는 조금씩 수정되고 있지만, 건강보험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간병비는 환자들에게 병원비의 두 배에 달하는 큰 부담이다. 간병인들이 환자들 위에 서서 ‘갑질’을 하며 간병비 인상을 부추기고 있다. 간병비야말로 건강보험에 포함시켜야 할 필수 항목임에도 보건복지부와 박근혜 정부는 신경조차 안 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당시 건강보험 및 의료비 공약 (출처 : 경향DB)



증세 없이 의료비 부담을 경감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박근혜 후보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공약 뒤집기 사례는 많지만, 하루하루를 장애와 사투를 벌이는 환자들에겐 기대를 부풀리는 공약이었다. 나와 같이 임상에서 직접 뛰며 장애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애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에 머물며 탁상행정을 하고 있는 대통령은 그들의 애환을 알고 있을까? 민심을 달랜다고 쪽방촌 할머니를 찾아가 사진 촬영 한번 한다고 그들의 생활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만 도움이 될 뿐이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내걸었던 비급여 항목의 전액 지원 공약을 임기 내에 완수하는 것이다.

오늘도 추운 날씨에 장애인들은 앞날을 예견하지 못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들의 간지러운 등을 긁어줄 사람은 여의도에서 국회 파행과 협상을 거듭하고 있는 국회의원과 중차대한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임을 잊어선 안되겠다.

이준수 | 서울 녹색병원 작업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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