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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정치학자 존 킨은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된 대작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양현수 옮김, 교양인)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에 의한, 겸손한 자들을 위한 통치”라고 풀이한다. 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대의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파수꾼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공적 감시와 통제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단지 권력의 오만함을 경계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의 야망을 멀리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민주주의를 누리고 꾸려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큰 도약을 가져온 촛불혁명이 왜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를 향한 국민들의 신뢰가 왜 식을 줄 모르는지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문 대통령만큼 ‘겸손의 정치’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지도자가 또 있을까? 우리는 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뛰어넘은 민주당의 압승을 보고 문 대통령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결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심정 토로는 지난 선거의 가장 빛나는 의미가 오만한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냉엄한 심판이었음을 꿰뚫어 본 겸손한 지도자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게다.

모든 권력은 적절한 감시와 견제가 없으면 언제든 오만해질 수 있고, 오만은 반드시 응징되기 마련이다. 문 대통령 같은 겸손한 지도자가 정점에 있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권력도 예외일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바로 그래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지방정부에 대한 특별감찰을 계획하고 나섰을 테다. 청와대가 나서서라도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방 권력에 긴장감과 절제를 주문하려고 말이다. 겸손함에 대한 단순한 호소만으로는 민주당 권력이 오만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힘들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감찰 정도로 충분할까? 결코 그러지 못하리라는 점은 역시 문 대통령부터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민주당은 TK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집권당이다. 호남 지역에서는 오랜 집권 탓에, 부·울·경 지역에서는 새롭게 민주당 쪽으로 넘어온 토호 세력 중심의 기층 조직들 때문에, 민주당의 지역 정치는 언제든 관성과 오만과 부패의 늪에 빠질 우려가 크다. 우리 주권자들은 지역 의회에서 정당정치 수준의 감시와 견제가 구조적으로 작동하기 힘들게 민주당에 압도적인 의석을 주었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최근 불거진 국회의 특활비 문제를 보면 여야 정당들끼리의 상호 감시와 견제도 허울로만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과연 무슨 수로 오만의 늪에 빠지는 걸 피할 수 있을까?

정당정치 차원에서만 해법을 찾지는 마라. 우회로, 아니 오늘날의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에 맞는 유일한 정답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시민사회와의 협치를 상설화하고 구조화하며, 일상적인 시민의 참여와 감시와 견제가 가능하도록 더 많은 공간을 마련하는 데 말이다. 말하자면 더 많은 ‘참여연대’를 민주당이 앞장서 불러내고 장려해야 한다. 상설화된 공청회나 협의회 같은 것은 물론이고, 시민참여 예산제, 시민 발안, 시민 소환, 옴부즈맨 제도 등 실천하고 실험해볼 만한 많은 방안들이 있다.

사실 이런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협주’에 대한 필요는 지역정치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협주는 민주주의의 세계적 모범을 보여준 촛불혁명을 이끈 원동력으로서, 우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보여준 바, 시민정치는 정당정치의 안티테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민정치의 에너지야말로 정당정치의 가장 확실한 자양분이었다. 시민정치는 정당정치를 지지하면서도 감시와 견제에 나서고, 정당정치는 스스로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시민정치를 더 강화하고 형성하도록 돕는 바로 이런 긴장적 상호강화야말로 우리 촛불혁명이 보여준 새로운 민주주의의 정수였다.

물론 두 차원의 정치는 서로 다른 문법에 따라 작동한다. 시민정치는 시민의 생활세계가 요구하는 인권, 평등, 공생, 삶의 인간적 질 같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반면, 정당정치는 국정운영을 겨냥한 안정, 번영, 법치, 갈등의 해소 같은 실질적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두 문법은 그저 모순하고 대립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실천적인 역할 분담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조율되어야 한다. 겸손의 정치는 단지 이렇게만 완성될 수 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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