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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스플리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른 아침, 텅 빈 거리를 걷다가 한글 간판을 발견했다. 딱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게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가게를 열기까지의 고생담과 크로아티아 행정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고, 계산대에 서 있던 아내 분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부가 방금 전까지 심하게 다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남편은 이 도시에 단 3명밖에 없는 한국인 중 2명이 바로 자신들이며, 나머지 한 명은 현지인과 결혼한 분이어서 자신들보다 낫다고 했다. 그래도 한국 사람이라고 10% 할인을 해주는 가게에서 몇 가지 물품을 사서 나왔지만, 무거워진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서 외국 생활의 생생한 민낯을 목도한 후에도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능력만 된다면야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기술과는 거리가 멀고, 현지 언어도 뛰어나지 않은 내게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나라에 가볼 때마다 ‘여기도 좋다’ 싶다가도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사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를 반복하는 패턴이니, 진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깝다.

외국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꾸 외국에서 사는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은 아직은 내가 낭만적이거나 철이 없기 때문일까? 요즘은 세계일주를 하면서 각 나라에 정착한 한국인 이민자들을 인터뷰하는 부부의 글을 자주 읽는다. 내 소셜미디어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해외 생활기가 자주 올라오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제주부터 말레이시아, 아프리카까지 여행 중이거나 생활 중인 사람들이 올린 소소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낯선 나라에서 새 삶을 시작한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다른 삶’ 연재기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 딱이다. 호주의 ‘워홀러’로 변신한 기자, 도쿄에서 바를 운영하며 4남매를 키우는 부부, 포틀랜드에 정착한 일러스트레이터와 작가 부부까지…. ‘떠남’을 감행한 그들의 용기와 선택이 부럽다가도 ‘흥칫뿡!’ 유치한 질투가 생기기도 하고, ‘나도 갈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갈팡질팡할 때마다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눈물’로 총알을 만드는 작가, 네덜란드의 첸 위 페이다. 첸은 이방인으로 살았던 유학 생활 동안 힘들어하며 흘린 눈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눈물 총’을 통해 시각화했다. 그녀의 졸업작품이기도 한 ‘눈물 총’은 실리콘 깔때기를 얼굴에 착용해 눈물을 모으고, 극저온 액체로 이뤄진 통 안에서 눈물을 냉각시켜 총알로 발사한다. 자신의 고통을 작품으로 시각화한 첸의 도전은 화제가 됐고, 나는 그 강렬한 이미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물 총을 얼굴에 부착한 첸이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어차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살아도 이방인인 건 똑같지 않으냐고. 이번에는 그녀가 아니라 마음속의 목소리가 묻는다. ‘그럼 어떻게 다르게 살 건데?’ 나는 망설인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사회의 기준이나 통념을 잘 따르며 살아온 사람이고, 그렇다 보니 그 선을 넘는 것이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다. ‘남들 사는 대로’ 사는 것조차 한국에서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평균’이나 ‘정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삶을 존중할뿐더러 대단할 정도로 다르게 살 자신도 없다. 다만 그 기준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순간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한국식 오지랖’이 피곤할 뿐이다. 끝내 나는 마음속 목소리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살아가면서 답을 찾게 되겠지만, 일상에 익숙해지는 대신 지금처럼 머릿속으로나마 세상의 다른 곳을 끊임없이 주유하면서 살고 싶다. 누군가의 삶도 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명쾌하지는 않고, 선택의 연속인 삶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론을 빨리 내기 위해 조급해하지는 않으려 한다. “한국에서 내가 가장 잘했던 일은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지’라는 말들을 믿지 않았던 것이었다”는 전직 기자이자 현직 워홀러인 김여란씨의 말을 되새기면서.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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