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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길을 한자어로 ‘도로’라고 하는데, ‘도(道)’와 ‘로(路)’는 본디 그 형성과정과 의미가 다르다. 글자를 뜯어보면, ‘도’는 ‘우두머리(首)가 무리를 거느리고 천천히 걷는(쉬엄쉬엄갈 착) 것’을 형상화한 것이고, ‘로’는 ‘여러 사람이 제각각(各) 편한 대로 걸어간 발(足)자취’를 표현한 것이다. ‘로’는 자연지형에 순응하는 길이며, 인위적이되 인위적이지 않은 길이다. 이 길은 자연 속에 난 길이며 자연을 향해 뻗은 길이다.

반면 ‘도’는 거대한 권력을 쥔 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풀과 나무를 베고 언덕을 깎아내며 도랑을 메워서 넓고 평평하며 곧고 길게 다져 놓은 길이다. ‘도’는 기본적으로 횡대를 위한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권력자의 호령에 따라 열을 맞추어 행진하기 위해 만든 길이며, 그 행진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런 길은 또 인위적 시설물들로 장식되는 길이다. 길의 한쪽 끝에는 으레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나 신전이 서며, 다른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자리 잡는다. 길 양측에는 보통사람의 살림집보다 훨씬 큰 건물들이 늘어서서 흡사 높은 벼슬아치가 최고 권력자 앞에 좌우로 시립(侍立)한 모양새를 갖춘다. 그래서 ‘도’는 곧 ‘제왕의 길’이다. 유교에서 ‘왕도’란, 넓고 평평하고 곧아서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절대적 공공성을 의미한다.

조선왕조가 정궁으로 지은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이 바로 ‘왕도’였다.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이다. 북단에 경복궁, 좌우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 등 국가 중추기관들이 들어선 이 길은, 자체로 유교국가 조선을 압축해 놓은 곳이었다. 

이 길은 주로 장엄한 퍼레이드를 통해 권력의 위엄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경복궁이 왕의 처소였던 만큼 민원이 향하는 최종 귀착점도 이 길 끝이었다. 태종 때 광화문 안에 신문고를 설치한 것도 ‘만남과 소통’이라는 이 길의 철학적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1428년(세종 10) 5월, 양반집 여종 한 명이 광화문 밖의 종을 쳤다. 왕이 승지를 시켜 문 안의 신문고를 두고 문 밖의 종을 친 연유를 묻자 그는 “의금부 당직원이 신문고를 못 치게 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세종은 “신문고는 백성들의 사정이 위에 통할 수 있게 하려고 설치한 것인데, 그걸 못 치게 막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담당 관원들을 파면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높은 곳 사이에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 조선의 황금시대를 만든 진정한 힘이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중에 소실됐다가 고종 즉위 초에 중건되었다. 신문고는 다시 설치되지 않았으나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엎드려 개항에 반대했던 곳도, 동학교도 수십명이 모여 교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한 곳도 광화문 앞이었다.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뒤 한동안 광화문 앞길은 한국 역사의 중심무대라는 지위를 잃었다. 이 길 북단이 다시 권력의 처소가 된 것은 일제가 광화문을 치우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은 1926년 이후였다. 그러나 이 권력에는 민중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도 광화문 앞길에는 몇 차례 대규모 인파가 모여들었으나, 그들은 조선물산공진회, 조선박람회 등 권력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에 동원된 구경꾼일 뿐이었다.

1939년 경복궁 뒤 경무대에 새 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경무대라는 지명은 경복궁을 중건한 뒤에 생겼는데, ‘무예를 구경하는 대(臺)’라는 이름 그대로 열병식이나 무과 시험을 치르는 곳으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백일장이나 운동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조선 총독이 이 자리를 새 관저 자리로 정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안전 때문이었다. 그에게 조선인 사이로 들어갈 이유는 없었으나, 조선인의 접근을 막아야 할 이유는 많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일제가 붙인 광화문통이라는 지명은 세종로로 바뀌었다. 이제는 중앙청이 된 옛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세종 시대와 같은 정치가 펼쳐지길 바라는 ‘신민의 마음’을 담은 이름이었다. 1948년에는 헌법이 제정되고 민주공화국 정부가 공식 출범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처소는 여전히 옛 총독관저를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 12월, 대통령 윤보선은 “경무대가 전 정권 때에 폭정을 자행한 곳으로 국민들에게 원부(怨府)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청와대로 개칭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관저는 푸른 기와집도 아니었으니, 무척 억지스러운 개명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식민지 총독의 관점에서 정한 최고 통치자의 처소라는 장소적 성격이 바뀔 리 없었다.

지난겨울 내내, 연인원 1700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광화문 앞 넓은 길을 점거하고 촛불을 들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내외에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으로써 ‘왕의 길’로 조성되어 권력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이 길을 ‘시민의 길’로 바꾸었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오랫동안 세계인의 뇌리에 남을 장대한 스펙터클을 함께 만들고 함께 구경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선 총독 관저 자리의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고 광화문 앞길로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시도 세종대로·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참에 유교적 왕조국가의 이념을 담아 왕도로 조성되었던 이 길이, 민주주의 이념을 올곧게 체현한 ‘민도(民道)’로 재탄생하기 바란다. 

물론 현대의 ‘민도’도, 넓고 평평하고 곧아서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절대적 공공성을 표상해야 한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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