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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다. 생김새나 기질, 습관 등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핏줄’에 좌우된다는 뜻이다. 인류가 신분제를 만들어 유지한 수천 년간, 혈통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는 관념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관념이 특히 강해서,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원초적 기표(記標)인 이름도 혈연 집단 내 위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지었다. 이름 석 자 중 성(姓)은 가문의 기표이며, 항렬자는 가문 내에서 같은 위계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위치 기표였다. 개인에게 온전히 귀속하는 글자는 하나뿐이었다. 1980년대까지 중세 유풍이 짙게 남은 지역에서는 간혹 버스에 탄 노인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학생에게 다짜고짜 “네 아비 이름이 뭐냐?”고 호통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역 공동체가 협소하고 폐쇄적이었던 중세 사회에서는 본인과 그 아버지의 이름만 알면 그의 정체를 특정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서도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당사자를 ‘근본 없는 가문’ 출신으로 규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개인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에서 직업은 주요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일단 직업의 수가 아주 적었고, 사람의 행색만 보고도 그가 어떤 일을 해서 먹고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천민을 제외한 사람 일반을 흔히 ‘사민(四民)’이라고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밖의 직업은 천역(賤役)이었고, 천역에 종사하는 이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본래 직(職)이란 직위, 직분, 직권 등에서 보듯, 하늘이나 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일을 뜻했다. 그래서 관직이나 공직은 있어도 사직(私職)이나 민직(民職)은 없다. 업(業)은 고대 중국에서 악기나 제기(祭器) 등을 걸던 틀로서, 그 의미가 ‘만들다’나 ‘짓다’로 확장됐다. 세상에 물질을 추가하는 일, 그를 위해 하늘이 만든 자연을 개조하는 일이 곧 업이었다. 불교에서 업을 일종의 죄로 취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士)는 하늘의 뜻을 읽어 왕을 보필하는 일, 농(農)은 땅을 일궈 곡식을 생산하는 일, 공(工)은 사람의 손으로 천물을 가공하는 일로서 각각 천지인(天地人)에 해당한다. 상(商)은 세상에 보태는 것은 없으나 천지인(天地人) 각각을 연결하니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차별하는 직업 관념은 이런 우주관에서 생겨났다.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 사회가 변동하는 과정에서, 직업을 세분해서 인식하는 태도도 조금씩 확산했다. 17세기 중엽 한성부 북부 호적에는 종실(宗室), 부마(駙馬), 사대부, 의역(醫譯), 서도(胥徒), 시민(市民)의 6종이 기재되었으며, 19세기 초반 서울 시민의 직업은 직임자(職任者, 관료), 서리(胥吏), 공인(貢人), 시전상인(市廛商人), 군병, 행상좌고(行商坐賈), 수공업자, 한잡지류(閑雜之類)의 8종으로 나뉘었다. 1898년부터 1903년 사이에 작성된 광무호적에는 체전부(遞傳夫), 인력거, 총순(總巡), 순검(巡檢), 신문사 사원, 은행 부총무, 우두(牛痘) 등 수십 종의 직업이 추가되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매년 직업별 노임 통계를 작성했는데, 1910년판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는 총 42종이 노임 조사 대상 직업이었다. 여기에는 총독부 및 소속 관서 관리와 자영업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 잡음에 따라, 직업도 다양해졌다. 서울의 경우 도시민의 중핵을 이루었던 관료와 군인이 모두 실직했고, 왕실과 관청에 납품하던 시전상인과 공인들도 거래처를 잃었다. 대신 서당 훈도, 매약상(賣藥商), 대서소(代書所), 복덕방, 은행 회사 사무원, 신문 기자, 인력거꾼, 전차 차장, 공장 직공 등의 새 직업들이 생겼다. 새로 생긴 직업은 세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공장 직공이나 전차 차장이 되는 데에 가문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당연히 개인의 삶에 대한 가문의 구속력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신문이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도 사회 변화를 뒤따랐다.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사동 사는 42살 김 아무개’라는 식으로 거주지 정보와 나이, 이름만을 기재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1920년대부터는 여기에 직업 정보가 추가되었다. 현대의 신문들은 거주지 정보나 나이는 빼고 이름과 직업 또는 소속만을 기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날에는 ‘피는 못 속인다’보다 ‘직업은 못 속인다’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된다. 현대의 직업은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본 요소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며, 직업 활동을 통해 세계를 구체적으로 경험한다. 사람들의 세계관은 그의 직업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결합해 있다. 알고자 하는 의지도 기본적으로 직업적 관심에 제약된다. 사람들은 자기 직업 활동에 필요한 지식들만을 긁어모아 ‘가치관’을 형성한다. 직업은 또 사람의 지위, 품성, 교양을 평가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명함에서는 이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직함’이다.

직업이 곧 정체성인 시대에 직업의 안정성이 무너진 것은, 사람들의 정체성이 무너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정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은 사회가 혼란한 사회다.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까? 근래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벨(Work & Life Balance)’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젊은층에서는 ‘워라셉(Work and Life Separated)’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일과 생활을 분리시키겠다는 발상이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면, 삶의 다른 영역에서 ‘정체성’을 만들려는 집단 의지도 더 강해질 터이다. 그때, 역사도 새로운 단계로 이행할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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