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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시작되지 않았어야 한다. 대체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가 얼마나 되나? 국정화를 중도에 그만둘 기회도 여러 번 있었다. 정말 많은 국민이 반대했을 때, 정책을 추진한 세력이 탄핵당했을 때, 교육부 스스로 올바른 교과서란 명칭을 포기할 정도로 편향과 부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을 때가 그랬다. 그런데 이게 뭔가? 교육부와 일부 시·도교육청이 온갖 꼼수를 동원하고 갖은 혜택을 준다는데도 채택하는 학교가 없다. 학교 구성원의 반대를 깔아뭉개고 억지로 밀어붙였던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까지 들고일어나서 반대한다. 대자보를 쓰고, 집회를 하고, 필리버스터를 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처음부터 역사교육 발전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에서 드러났듯이 정권이 국민 편가르기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지려고 진행한 일이다. 주범이 단죄를 받고 있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같은 목적으로, 같은 시기에 추진된 일이다.

20일 오전 경북 경산 문명고에서 학생들이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학교가 학생들에게, 교육부가 국민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으려면, 국정교과서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국·검정 혼용이니, 연구학교니, 보조교재로 보급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리고 교학사 검정 통과부터 3년 반 동안의 일을 교훈 삼아 역사교육을 새롭게 설계하기 위한 토론을 시작하자. 어떤 역사교육은 안 되는지, 어떤 역사교육을 지향할 것인지 지금이라도 대화의 장을 열자. 99.9% 학교가 채택한 교과서가 편향되었고 그 나머지 0.01%가 상식적이고 올바르다는 억지주장일랑 거두고, 헌법정신과 교육기본법에 나타난 민주시민 형성을 위한 역사교육의 방향을 토론해보자.

차제에 교과서 형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정선된 지식을 체계적으로 나열한 교과서를 바탕으로 한 5지선다형 지식 교육은 이제 끝내자. 토론수업이 가능하도록 풍부한 자료를 싣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수업이 가능한 완전히 달라진 교과서도 상상해보자.

현재 진행하는 검정 일정은 일단 중지해야 한다. 44억원을 들여 1년 반 동안 만든 책에서 엄청난 오류와 편향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대체 왜 편향되었다는 지금 집필기준을 적용하여 다섯 달 만에 검정교과서를 만들라고 강요하는가. 2017년에는 우선 역사교육의 내용이나 교과서의 형태에 대하여 많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마련하는 해로 정하자. 검정 방식도 손을 보자. 최소한 지금 교육부가 정해놓은 1년6개월 이상은 보장해야 한다. 교육부가 검정 절차를 진행하더라도, 검정 기관의 내용 개입은 최소화하되, 전문가를 충분히 투입하여 오류가 없는 책을 만들자. 국정교과서 개발에 들인 돈의 10분의 1만 들여도 가능한 일이다.

새 교과서가 개발될 때까지는 지금 교과서를 그대로 쓰면 된다. 어차피 지금 교과서는 이명박 정부가 내용기준을 만들고, 박근혜 정부가 검정했으며,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강제수정까지 했다. 그 책을 2020년까지 쓰면 위 일정을 확보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역사가 요즘처럼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는 상황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이 역사교육을 정치적 동원 수단으로 활용하고, 그때마다 국민들이 이리저리 편을 갈라 갈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존엄하다. 우리 헌법 10조의 가치다.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다름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하며, 서로 다른 이들이 소통하면서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는 역사교육을 할 수 없을까? 권력이 부당하게 역사를 이용하려 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다. 역사교육은 교사와 역사학자들에게 맡기고, 교육부나 정치권은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 학생들은 역사 말고도 여러 교과를 배우며, 교육당국은 교과 공부와 관련된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 교육부 장관이 공대 교수 출신인 걸로 안다. 국정교과서 문제로 씨름하지 말고, 잘하실 수 있는 일로 국가에 헌신하길 바란다.

김육훈 | 역사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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