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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서울대 교수·정신분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억울하다고 한다. 가해자만 없으면 자신의 삶이 훨씬 평안하고 행복하며 장래성이 있다고 호소한다. 사람들이 피해자를 연민 어린 눈으로 보고 동정한다. 그러니 피해자를 혹시 비난하는 듯 들리는 말을 꺼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말 본격적으로 비판하면 근거가 있어도 다중의 비난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하는 주장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늘 옳은가?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안전하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100% 그른가? 예를 들어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다가 시비 끝에 다른 사람에게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도박을 하다가 돈을 잃은 사람은 피해자인가, 가족의 생계를 망친 가해자인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과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 사이에 중간적 견해를 갖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하는 피해자에게 그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듣고 피해자가 혹시라도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를 캐묻는다면 이는 매우 부적절한 일이 될 것이다.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캐묻는 사람을 공격하며 여론에 호소할 것이다. 다중의 정서는 피해자를 지지할 것이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자초지종도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그 사람이 다시 또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예측하고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학대 피해 노인들이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늘 사귀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지내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그저 결백한가? 아니면 져야 할 책임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쉽게 보면 피해자는 옳고 가해자는 그르지만 관계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피해자가 피동적으로 피해를 당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상황에 맞서 싸우거나 그 상황을 피할 방법은 있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이제는 피해와 가해의 상관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진실을 밝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피해자들이 평생을 피해자로 살아가며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비슷한 피해를 반복해서 입는 일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피해자로만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동적으로 피해자의 역할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서 돌만을 탓하는 것과 같다. 길에 박혀 있는 돌을 못 본 자신의 잘못도 인정해야 피해자 역할에서 벗어나 거듭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든 일을 겪을 때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며 우울증에 빠지라는 것은 아니다. 정신건강의 요체는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각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피해자 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 추가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악의를 가진 교활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취약성을 쉽게 알아차린다. 당신을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그가 일찍 간파한다는 말이다. 자신감이 없고 소심함은 행동에서 다 나타난다. 피해를 당한 후에도 입을 다물 것을 알기에 그들은 당신을 또 찾거나 다른 사람들을 물색한다.
더 늦기 전에 피해자가 피해를 당하게 된 경위를 스스로 돌이켜 보도록 돕는 행위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나쁜 짓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로 남으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고 책임을 면할 수는 있겠으나 정신적 성장은 지연된다.
요새 정치권에도 자신이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분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들은 그만하면 자신이 결백한 쪽이므로 비판과 조치가 억울하다고 강변한다. 남들도 다 하는 짓이니 문제가 불거진 것은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대한민국에는 피해자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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