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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혀는 말한다. 눈은 본다. 귀는 듣는다. 세 치 혀로 못할 말이 없다. 두 눈으로는 세상을 본다. 두 귀로는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 모든 것의 뒤에는 마음이 있다.

혀는 마음에 담은 것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술 먹은 상태에서는 평소 꺼리던 솔직한 이야기가 혀끝에 담겨 나온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다. 술의 영향으로 긴장이 풀어져서이다. 맨 정신으로 했다가는 큰일 날 이야기를 술 핑계로 풀어낼 수도 있겠다.

눈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지만 넓은지, 깊은지, 흐려져 있는 창인지는 각자가 눈을 가꾸고 다듬은 수준에 따라 다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은 의심할 필요 없는 진실의 전부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눈 A가 본 것과 눈 B가 본 것의 차이가 마음먹은 바의 차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의 소리를 들으라고 열려 있는 귀 역시 들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듣는 것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자신의 마음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성향인지라 듣는 내용과 맥락은 귀 A와 귀 B의 주인이 마음먹은 바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귀로 분명히 들은 것은 당연히 진실의 전부라고 믿는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정도언 교수 l 출처:경향DB

각자의 인생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에서 혀, 눈, 귀의 비중을 배분하는 형태가 달라진다. 제대로 살펴보거나 잘 듣기보다는 혀끝에 삶의 가치를 두는 사람은 무슨 말이나 일을 했든지 해명, 변명을 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요설(饒舌)이라는 단어도 생겼는데 흥미롭게도 사전에서 찾아보니 북한어로는 “말을 잘하는 혀”라는 의미로 나와 있다.

혀를 놀리기는 쉽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동과 인기몰이를 하는 재미도 있지만, 반면에 잘 듣고 제대로 보는 일은 지루한 일이다. 더욱이 잘 듣고 보다가 평소 자신이 지켜오던 신념이 흔들린다면 큰일이 될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입장이라면 남이 하는 다른 이야기를 잘 듣고 좁게 보던 세상을 넓게 보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게 누군가가 나서서 “제대로 듣고 보세요!”라고 하면 일단 화를 버럭 내기 마련이다. 고착된 신념이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껴서이다.

말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는 사람이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만 ‘말만 많은 세상’에서 대중의 점수를 따기에는 불리한 면이 없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혀끝만 잘 놀려도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팽배하고 있는데 이들이 구사하는 수사법(修辭法)은 특징적으로 매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식이어서 녹음해 놓고 반복해 들으며 세밀한 분석을 하기 전에는 그 속에 담긴 참뜻을 파악하기 어렵다. 특정 사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인지, 그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비켜가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안개 속에 빠져든다. 답답해진 사람들은 이들에게 점점 관심을 기울이고 신문·방송도 이들의 동정을 세세하게 보도하고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 위해 애쓰니 정치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큰 방법이기도 하다. 납득하기 어려운 언행에 대해서는 무관심이 해결책인데 관심 쏟기를 통한 강화와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그러한 언행이 오히려 증폭되고, 결국 기묘한 순환고리가 만들어져 지속되는 것이 현실이다.

흔히 생각하기에 신념이란 쉽게 변하면 안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고착되어 변화의 흐름에 경직된 신념은 더 이상 신념이 아닌 과거의 잔재물일 뿐이다. 태어나서 부모에게 의존하다가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를 거쳐 독립된 개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신념도 초기의 ‘확신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진정한 신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고착된 신념은 그 개인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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