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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검은 색안경으로 감시의 눈빛을 감추는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검은 색안경을 멋 내기 위해서도 아무나 낮밤으로 쓴다. 낮에는 감기 환자, 밤에는 도둑이나 강도 정도였는데 요즘 산책로에서는 햇빛과 먼지를 피하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의 정체를 가리는 일은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사이버 공간으로 확대됐다. 대한민국의 사이버 공간에서도 “감출 수 없게 할 것인가, 감추게 놓아둘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의 논쟁이 이루어진 바 있고, 2007년에는 사회적 폐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터넷 실명제’(이하 실명제)가 도입됐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이 제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부터 위헌 결정까지 (경향신문DB)


 이제 갈망하던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고, 지난 5년간 시민의식 성숙에 따라 악성 댓글의 폐해는 사라질 것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실명제 폐지를 덮어놓고 환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폐지에 대한 찬반 논리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찬반 논란의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기분으로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이 본격적으로 보장되면 어떠할지를 읽어보려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오래전에 인간의 마음을 무의식·전의식·의식이라는 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이론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이드·자아·초자아라고 하는 세 가지 기능이 섞여 있는데, 이드는 무의식적 충동들의 모임이 활동하는 것이고, 초자아는 양심·도덕·윤리·이상이 모여 움직이는 것이며, 자아는 이드·초자아·현실 사이에서 협상하고 조정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감추는 것과 같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글을 써 올리는 행위와 연관이 되는데, 내가 누구인지를 남들이 알 수 없는 상태로 내 생각을 제약 없이 표현하는 이점을 가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면서 사회적 통념이나 윤리·도덕에 비추어 편집, 삭제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익명으로 쓰는 글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충동을 훨씬 더 많이 포함하며 자아나 초자아보다는 이드가 주도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이제 성적·공격적 표현은 물론이고 논리성·합리성보다는 “내가 그렇다는데 왜 잔소리가 많아!”식의 막가는 글도 자주 읽게 될 것이다.


익명성의 세계에서는 기가 확 살아난 이드와 달리 초자아나 자아는 풀이 죽는다. 그렇게 되면 악성 댓글이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쓰기는 매우 쉬워진다. 익명으로 올리는 글에서는 “내 글을 읽는 남들이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지”라는 자의식이 있어야 움직이는 초자아가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마치 방범용 폐쇄회로 TV가 없는 곳에서 범죄 행위가 훨씬 더 대담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자아의 입장에서도 초자아가 이미 무력해진 상태에서 홀로 이드의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현실세계와 협상해서까지 글을 합리적이거나 점잖게 쓰려고 굳이 애를 쓸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이 불러오는 사회적 폐해를 줄이려면 개인이 아닌 사회의 힘이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필요하다. 개인의 초자아는 사회의 사법제도로 옮겨가고, 개인의 자아가 우리 사회의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사법적 판단이나 시민의식이 그 정도 수준으로 성숙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간의 경과를 살펴보면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익명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다가 결국 어디인가 중간지점에서 자리를 잡을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회적 폐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익명의 접속과 무한 표현의 자유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출발 신호는 이미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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