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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홉스는 국가를 성서에 나오는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했었다. 절대왕정을 지지했지만, 국가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그 뒤에 나오는 민주적 사회계약론의 등장에 다리를 놓았다. 국가가 괴물이 된다 하더라도 거리의 무뢰한보다 낫다고 믿었기에 그는 국가를 필요악이라고 했으며, 그러니 참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자들은 국가가 괴물로 변하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국민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된다.

저명한 현대 정치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조금 더 독하게 말하는데, 1985년 논문에서 국가가 조직폭력배와 유사하다고 규정했다. 근대 절대왕권국가를 모델로 했지만 현재에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하다. 폭력에 대한 합법적 독점에 기초한 국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합법적으로 집권해도 공공성을 상실한다면 조폭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국가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의 급속한 확산은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 부재와 비밀주의가 국민의 공포감 조성에 큰 몫을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갖가지 추측과 소문들이 무성했는데, 정부는 이를 괴담으로 규정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을 엄벌하겠다고 나섰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괴담은 ‘괴상한 이야기’로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말한다. 진실과 다른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사람들의 불안을 가중해서 사회혼란을 초래하는 괴담은 막아야 하고, 그런 일을 고의로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생명이 달린 중대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를 생각하면 괴담 엄벌론은 주객전도이며, 또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행위이다. 현 정부를 보면 괴담의 의미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이제 괴담은 ‘괴물이 된 국가가 뿜어내는 주객전도와 무능의 이야기’이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번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재차 던지게 한다. 정권을 국가로 환치하기에는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무리수가 따르지만 그래도 통치 권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켜내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임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러한 국가를 가지지 못했다. ‘조폭’과 똑같은 모습의 군사독재시절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국가는 국민의 죽음을 방치하면서 도리어 국민을 향해 분노하는 괴물이 되었다. 국민의 권리를 짓밟은 난폭한 괴물과 수십년을 씨름해온 우리는 이제 무능한 채 화를 내며, 정권의 안위만 생각하는 괴물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기막힌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는 날 서울광장에서 열린 추모음악회에서 가수 이승환이 이렇게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참 불쌍한 국민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지켜주지 않는 국가의 무관심과 무능함을 알아차려 버려서 그렇습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은 작년 7월, 서울 시청광장에서 가수 이승환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양치기 소년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이솝우화 <늑대와 양치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강백이 쓴 연극 <파수꾼>이다. 연극 속의 파수꾼은 이리떼의 공격을 감시하고, 습격이 있을 경우에는 양철북을 두드려 마을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런데 원래 버전과는 달리 촌장이 마을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거짓으로 북을 치게 했다. 거짓말하는 국가권력, 특히 북한의 남침 공포로 독재를 유지해온 것을 풍자하는 연극이다. 양치기 소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파수꾼에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계속 속이면서도 버틸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역설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안보 공포를 조장하던 파수꾼 국가가 괴담을 빌미로 양치기 소년을 잡겠다고 나선다. 사태의 심각성을 제기한 지방자치단체장들마저 양치기로 몰았다. 국가는 국민을 질타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고, 섬기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국민을 수단으로만 보고 통제 권력만 흔들려는 괴물이 되고 있음이 이번 일로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국가가 사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치기 소년의 괴담보다 괴물이 된 국가의 괴담이 훨씬 공포스럽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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