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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선(善)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다. 애초에는 착했는데 성장하면서 악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든지 인의예지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리 차가운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잠시라도 가엽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 생기곤 하고,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몰래라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을 갖기 마련이다. 특히 수오지심은 사회가 정당하고 건강하게 유지되는 근간이 된다. 우리가 흔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도 수오지심의 발현이다.

수오지심을 달리 표현하면 ‘창피한 줄 아는’ 마음이고 (불의를) ‘참을 수 있는’ 자세이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 웃음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대고 놀리거나 조롱하는 이가 있다면 말려야 마땅하다. 쉽고 당연한 일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본과 벨기에의 월드컵 경기에서, 공영방송 해설자는 자신의 반일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냈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이를 “본능을 숨길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본능이라는 말로 양해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도 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해설자의 덕목이다. “불편한 분이 계셨다니 주의하겠다”는 방송사의 어설픈 해명에서도 수오지심은 찾을 수 없다.

배우 정우성씨가 지난달 27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정씨는 제주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난민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다수의 축구팬들은 해설자의 흥분을 두둔하는 눈치다. 통쾌했다는 반응도 있다. 얄미운 일본이 졌으니 고소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나아가 정당화하는 것은 ‘창피를 모르는’ 일이다. 혹자는 독일의 탈락을 조소하는 영국 언론을 들먹이기도 하지만, ‘더 선’이나 ‘데일리 메일’ 등의 신문들이 포르노나 진배없는 선정 대중지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공영방송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더 선’은 독일 탈락을 보도하면서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를 썼다. ‘고통’과 ‘기쁨’의 합성어로, ‘다른 이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을 뜻한다. ‘쌤통 심리’로 번역될 만한 단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대중 스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스타를 욕망하면서도 그들의 몰락을 즐거워하는 이중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샤덴프로이데는 치유나 문제 해결로 연결되지 못한다. 심리학자 리처드 스미스의 지적처럼, 남의 불행을 즐기다가 남의 불행을 바라게 되고, 나아가 그 불행을 직접 유발하려는 의지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 샤덴프로이데의 함정이다.

영·독관계나 한·일관계의 역사와 기억이 영국인과 한국인의 정서에 미묘한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샤덴프로이데가 수오지심과 만날 때, 최소한 ‘창피한 줄은 알아야’ 한다. “쌤통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스포츠를 전쟁에 비유한다고 해서 전쟁의 윤리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뻔뻔스러움을 솔직함이라 정당화하는 것도 창피를 모르는 일이다. 일본의 패배를 조롱하는 것을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심지어 항일정신으로 포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일본 시청자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반문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런 지적에 “너 친일파냐?”라고 대꾸하거나 “착한 척 말라”라고 빈정대는 말을 참는 것이 ‘의’의 씨앗이라는 말로 족하다.

사실 ‘애국’이나 ‘민족’으로 ‘의로움’을 덮어버리는 경우는 상당히 잦다. ‘전 지구화’나 ‘다문화주의’ 같은 비교적 추상적인 개념도 평소에는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의미를 띠다가도 예를 들어 ‘반일 정서’와 만나면 심각한 균열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함의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정당한지, 의로운지 대개 인지하고 있고 세상은 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지만 그 신념의 토대가 튼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국면에서는 그 인지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수오지심을 잃지 않고 발현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이다.

난민에 대한 관심과 도움을 요청한 유명 배우에게 “네가 예멘 난민들 데리고 살아라”라고 대꾸하는 것은 또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분쟁 지역의 고아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이야기하면 북한 어린이 복지에는 왜 무심하냐고 소리치고, 기업의 갑질을 고발하면 정치권의 적폐가 더 심각하다고 불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탈락에 감격하며 즐거워하는 해설자의 존재는 방송사의 수정 가능한 실수였다고 치자. 하지만 공영방송이 일본 축구의 패배를 조롱해도 괜찮다고 생각할뿐더러 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이들의 존재는 수오지심이 사라져가는 현대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수오지심이 없으면 ‘의’가 없고 ‘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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