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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서울의 주일대사관 루트를 통해 한국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제정에 공식 항의했다고 한다. 이유는 “2015년 12월의 한·일 합의에 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2015 한·일 합의’를 통해 사죄를 표명했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타결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항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정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끝난 것인가. 일본 정부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일본이 아직도 공식적으로 법적 책임을 진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죄에 대한 인정은, 진상 규명을 통한 사실 적시와 당사자의 직접적 사과와 연관된다. 사죄의 진정성 여부는 동반되는 행위, 즉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 다짐을 담보할 만한 보증을 통해 판단된다. 배상과 재발방지를 위한 실천이 여기에 해당한다. 피해에 대한 회복적 조치인 배상은 금전적 보상을 포함하나 훨씬 포괄적이다.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은 한 번에 종결될 수 있으나 도덕적 책임은 지속적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자가 입은 육체적, 정신적 상흔은 완전히 회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적절하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받아들여진다. 사죄에 반복이 필요한 이유다.

죄에 대한 법적 책임 및 도덕적 책임과 별개로 다른 이들의 잘못된 행위를 통해 혜택을 입은 ‘우리’들은 정치적 책임을 진다. 과거 식민지 부정의로 인한 가시적·비가시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일본 시민들은 그 혜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다. 국가가 과거에 바로잡지 못한 잘못으로 인해 지속되거나 새롭게 생산되는 구조적 부정의, 이를 지지하는 법과 제도에 기대어 사는 한국 시민들 또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2015 한·일 합의’ 시 발표된 모호한 대리 사과와 ‘위로금’조로 지급된 10억엔을 통해 문제가 종결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어불성설이 된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 이를 체계적으로 실행 가능하게 하고 지시한 자들, 이로 인한 효과에 각종 혜택을 받은 자들, 동조하고 묵인하며 방관한 자들이 공식적으로 책임을 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도의적’ 사죄가 어떻게 가능한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명백한 성찰과 교정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미래지향적인 구조 변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구체적인 범죄사실이 적시되고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공히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를 대면해야만 이에 따른 도덕적 책임의 영역도 명확해질 것 아닌가.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사과에 대한 정당성은 누가 부여한 것인가. 아베 정권의 ‘소녀상’ 철거 요구는 폭력의 범죄 사실과 피해자의 경험을 부인(否認)하고, 여성의 존재 자체를 삭제하고자 하는 ‘가해자-남성’의 또 다른 범죄행위 아닌가.

분명한 점은 죄의 책임이 추궁되지 않고 지연되는 사이, 정치적 책임의 영역은 더 넓어지고 있는 역설이다. 저질러진 죄와 법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부인이 지속되고, 역사적 부정의의 청산이 계속 연기될 때, 과거의 잘못은 현재적 부정의로 재생산된다. 식민지 전쟁 범죄에 대한 가해자들의 부인, 죄를 법적으로 추궁당하지 않은 가해자들의 또 다른 가해 행위가 역설적으로 공동체의 정치적 책임의 영역을 확장시켜놓은 형국이 된 것이다. “미래 세대에 짐을 지게 할 수 없”어 한·일 합의를 강행했다는 아베 총리의 주장이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가운 일은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으로 역사적 부정의를 시정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제정, 연구소 설립, 박물관 건립 등의 계획은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과거 잘못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전승하고자 하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이를 일본 정부가 간섭하거나 방해하고자 한다면 진정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국가의 과거와 현재가 그렇듯, 미래 또한 일본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일본 시민들은 법적·도덕적 책무는 물론 지금도 확장되고 전승되고 있는 정치적 책임까지 통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냉전체제가 종식되지 않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에 비로소 균열과 변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수평적 연대 또한 실현 가능한 희망이 될 것이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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