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최근 헌법재판소가 법의 논리가 아닌 편협한 이념의 논리로 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권위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결정이 민주헌법의 해석자로 선임된 재판관들에 의해 내려졌구나 하는 아쉬움은 컸다. 헌법재판관들은 왜 민주정치 스스로의 자기조정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이 나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삐뚤어진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야당이 강하게 조직되어 있었더라면 헌재가 과연 이런 무모한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의 원칙이 현실에서 충돌할 때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헌법재판소를 민주주의의 가치에 맞게 기능하게 하려면 어떤 개선책이 필요할까.

그러나 그 뒤 헌재 결정이 언론에서 다뤄지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이 사건 역시 양극화된 말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비판언론의 외침에 가까운 규정을 보는 순간, 한국 민주주의 사망 선언을 그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세어보고 싶은 냉소적 생각이 앞섰다.

강하고 센 말의 인플레이션이 멈출 줄 모르고 심화되는 양극화된 여론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언론만이 아니라 정치인들과 지식인, 사회운동가의 말도 모두 격렬하고 전투적이다. 흔히 말은 ‘생각의 그릇’이라고 하는데 말이 이렇다 보니 그 안에 도통 생각이란 것이 담겨 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저 하도록 되어 있는 특정 코드의 말을 자동적으로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당연히 상투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게 말해도 그건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정형화된 관행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겠다.

상투적이 된 강하고 센 정치 언어는 상대에 대한 거부감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상대를 최대한 욕보여서 그에 대한 지지 여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속한 진영 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려 하지도 말하려 하지도 않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스스로가 속한 진영이 더 잘하도록 비판도 하고 격려도 해서 여론의 지지를 더 많이 받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사회 전체에 더 유익할 텐데도 말이다.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이 되면 스스로만 공허해질 뿐 달라지는 건 없다.

강한 말의 상투성, 민주주의 사형선고 (출처 : 경향DB)


상투적이 된 세고 강한 말이 갖는 더 큰 문제는 해당 사안과 관련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실체적 내용을 경시한다는 데 있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일단 성실한 조사와 검토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을 불필요하게 한다. 곧바로 ‘단죄의 논리’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여론의 단죄’를 말하든 아니면 ‘역사의 단죄’를 말하든 그런 주장을 이끄는 사명감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심판관이 되고자 하는 열정인 건 마찬가지다. 묵과할 수 없다는 결의는 일견 대단해 보이지만, 그리 오래 못가는 게 일반적이다. 여론의 반응이 미지근해지면 마치 펜을 꺾고 거리로 뛰어나가야 할 듯 호들갑스럽던 논조는 슬그머니 내려진다. 냉정하게 따지고 자세히 살펴야 할 ‘진짜 문제’도 함께 조용히 묻힌다. 지난 시기 있었던 많은 중대 사건들이 제대로 된 조사보고서나 백서 하나 없이 지나가고 만 것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은 강한 입장을 가진 소수의 양극화된 의견집단 때문이라는 진단을 한다. 기사마다에 달린 독자 반응만 보면 그렇게 보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좋은 해석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그런 의견집단들의 빠르고 확실한 반응에 의존해 불성실하게 글쓰고 무책임하게 편집해 온 언론종사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고 앞으로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고 하겠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소란스럽기만 한 ‘비창조적 흥분’ 대신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의 가치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중시되었으면 한다. 이번 헌재 결정이 존재감 없는 야권 탓도 크다면 제대로 된 야당과 실력 있는 진보정당이 되도록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한다.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