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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앞말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다. 뒷말은 이정희 전 진보당 대표의 일갈이다. 각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 해산이라는 사법적 사망선고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고 있다.

신문들 역시 민주주의의 잣대로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고 있다. 보수 신문은 “이념의 다양성은 지켜야 할 가치이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적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수는 없다”는 동아일보 사설의 언급처럼 대체로 대통령과 같은 눈높이에서 헌재의 결정을 엄호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반체제의 종북주의로부터 대한민국 헌법 체제를 수호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인 “종북 통진당, 대한민국 헌법이 심판했다”와 동아일보 사설의 제목인 “ ‘종북’ 통진당 해산, 민주헌법 수호 위한 역사적 심판이다”에 그러한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해방 직후 반공우익 진영이 만든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프레임이 온전히 작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보 신문은 “민주주의 후퇴시킨 진보당 강제 해산”이라는 경향신문 사설 제목과 “민주주의의 죽음, 헌재의 죽음”이라는 한겨레신문의 사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헌재의 결정이 민주주의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민주주의란 지난한 민주화 투쟁을 통해 쟁취한 정치적 성과로서의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진보당이 대의민주체제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이며 그 반대편에는 전체주의, 권위주의, 독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산물인 민주주의 대 독재 프레임 역시 오늘날 진보 진영에 강고히 뿌리내리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당파성이 덧씌워질 때, 민주주의는 사회 갈등을 상징하는 기호로 작동한다. 이와 달리 해방 직후에 분출했던 신민주주의는 통합과 중도의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민주주의‘들’이 갖고 있는 교집합적인 공통요소를 극대화하여 통합 가치로서 민주주의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제헌헌법에도 ‘신민주주의’적 가치가 반영되었다.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복지, 평등, 정의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가 공존했고, 지금의 헌법도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번 헌재 재판관들의 진보당 해산 결정에서 보여준 8 대 1의 쏠림 현상은 헌법에 녹아들어 있는 통합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를 무색하게 한다. 여기서 우려되는 점은 앞으로 진영 간 민주주의 논쟁이 서로를 더욱 양극단으로 몰아붙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19일 서울 대방동 통합진보당 당사에서 한 당직자가 '근조 민주주의'가 적힌 종이를 문틈에 이어붙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미국의 사회학자 제프리 C 알렉산더는 <사회적 삶의 의미>에서 오늘날 공적 논쟁에는 자신을 옹호하거나 상대를 공격할 때 ‘민주적/반민주적’이라는 담론 코드를 동원하는 시민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의 머리와 마음에 옳은 신념으로 똬리를 틀고 있기에 개인이든 집단이든, 심지어 독재자조차 민주주의의 잣대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한다는 얘기다. 또한, 알렉산더는 위기의 시기에 등장하는 공적 논쟁이 사회를 양극단으로 몰아갈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헌재의 진보당 해산 결정이라는 위기적 대사건으로 우리 앞의 민주주의 역시 사회 갈등의 확장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사회 통합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도 있는 기로에 서게 됐다.

1987년 6월 항쟁은 새해 벽두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의 헌법 수호 선언이라는 위기적 대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6월 항쟁을 이끈 지도부에는 자유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들과 민중민주주의를 꿈꾼 사람들이 동거했고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2014년 갑오년 말미엔 6월 항쟁, 즉 사회통합적 민주주의가 탄생시킨 헌재가 확실하게 한편에 서면서 민주주의와 헌법에 당파성을 부여하는 위기적 대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을미년을 맞아 갈등과 통합의 기로에 선 민주주의가 갈 길을 정하는 역사적 임무는 이제 시민의 몫이 됐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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