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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집회참가자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구잡이로 촬영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카메라를 매단 긴 막대봉 수십 개가 한순간에 솟아올라 집회참가자들을 겨냥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청운동으로 가려는 시민들을 인도에서 막아선 경찰에 대해 시민들이 항의하려는 순간에도 여지없이 경찰의 카메라가 등장하였다. 불법이고 합법이고 상관없이 경찰의 카메라는 집회 현장에 난무한다.
이를 경찰의 전문용어로 ‘채증’이라 부른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경찰의 채증건수는 2010년 2329건에서 매년 증가하여 2013년에는 5366건으로 3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실제 채증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찰청은 2015년 ‘집회시위 현장 불법행위 증거수집’ 명목으로 5억8597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전년도 예산에 비해 16.8% 늘어난 액수이다. 한 대당 400만~500만원에 이르는 고성능 카메라를 구입해서 ‘고도화된 채증’을 목표로 한단다.
경찰의 무분별한 채증으로 인한 인권침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경찰은 채증을 더욱 손쉽게 하는 방향으로 채증활동규칙을 개정한단다. 1월20일 경찰청이 마련한 ‘채증활동규칙’ 개정안이 경찰위원회를 통과했다. 경찰은 채증의 범위와 한계에 관한 합리적 기준을 마련하여 집회참가자의 인권보호에 기여하도록 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경찰의 자화자찬은 지나치다 못해 대국민 사기극 수준이다.
개정된 경찰채증규칙을 보면, 그간의 무분별한 채증에 대한 반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경찰의 채증을 더욱 쉽게, 더욱 자의적으로 할 수 있도록 개정한 것이 그 핵심이다.
채증의 요건을 보자. 종래 “불법 또는 불법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규정되어 있던 요건을 “불법행위 또는 이와 밀접한 행위”로 개정하였는데 요건이 엄격해진 것도 아니고 모호성은 여전하다. 남용의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는 ‘도 긴 개 긴’이다.
대법원은 수사목적의 촬영은 원칙적으로 법원의 영장에 의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다만 영장 없는 촬영은 ‘현재 범행이 행하여지고 있거나 행하여진 직후’이고 ‘증거보전의 필요성과 긴급성’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엄격한 요건을 제시한 바 있다. 작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도 경찰청장에게 대법원 판례에서 제시된 요건을 준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찰의 채증규칙은 대법원 판례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아예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채증요원에 의무경찰까지 포함시키고, 채증장비에 경찰이 지급한 장비 외에 휴대폰 등 개인 소유기기를 사용하여 채증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무분별한 채증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월7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해고자 전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을 시작하였다. 구로경찰서 정보과 직원이 행진단과 함께 이동하면서 노동자들의 행진 모습을 무단 촬영하다가 적발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기자라고 사칭하기도 하였다.
오체투지는 합법적인 행진이었다. 채증활동규칙이 규정한 “불법 또는 불법이 우려되는 상황”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비밀리에 채증을 했다. 어디 이 사건뿐이겠는가. 채증을 폭넓게 허용하는 규칙도 문제이지만, 경찰은 스스로 만든 규칙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시민들은 경찰이 어디서 어떻게 채증촬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집회에 참가한 ‘나’는 찍혔을까. 그것도 알 길이 없다. 경찰은 채증자료의 열람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채증규칙은 수사 등 목적을 달성한 경우에는 지체없이 파기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채증자료가 과연 파기되었는지, 언제 어떻게 파기되었는지, 혹시나 사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전혀 통제되지 않는 채증의 권력, 이게 현실이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서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의원이 교통관제 CCTV의불법체증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집회시위에 대한 경찰의 무분별한 채증은 시민을 겁박하는 수단이자 ‘사찰’의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집회시위 엄단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기조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시민들에게는 ‘사찰’ 당하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으라’며 마구잡이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바로 경찰의 채증이다. 우리나라가 법치국가가 맞다면 이런 불법 채증은 당장 멈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호중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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