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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이른바 ‘된장녀’ 논란은 2006년에 시작되어 ‘루저’ 논란으로 비화했었다. ‘루저’ 감성이 대중문화의 중심부로 들어온 것은 2008~2009년경이었고 <88만원 세대>가 세대와 청년 빈곤 문제에 새삼 빛을 던진 것은 2007년. ‘지잡대’라는 말도 그즈음에 생겨나 퍼졌던 걸로 기억한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대학체제에서 지방대학의 안타까운 처지를 모욕적으로, 무한 경쟁체제와 ‘까칠한’ 마음(정동)을 반영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2007년에서 2009년 사이 이명박 시대의 개막,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등을 겪고 난 뒤 ‘진영’의 골과 마음의 강퍅함은 더없이 커졌다. 크게 바뀐 정치와 감성(정동)은 언어 체계도 바꿨다. 사회적 약자를 비하·조롱하는 인정사정없는 말들은 끝없이 새로 생겨나 일상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다.
디시인사이드(1999)에서 분화한 ‘일간베스트’가 생겨난 것은 2010년, ‘일베충’이라는 단어가 모두가 아는 말이 된 것은 다시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12년경이다. 특히 ‘일베’는 실로 높은 생산력으로 ‘진지충’ ‘유족충’ 등 벌레 계열과, ‘씹선비’ ‘보슬아치’ 등 성기로 환원된 인간상을 주조하거나 그런 언어의 조어법을 제공했다.
‘한남충’ ‘씹치남’들은 그것을 받아친 파생어다. 이제 ‘맘충’ ‘급식충’도 있다 하니 이런 명명법에 의하면 이 땅에는 벌레가 아닌 존재가 없다. 아마 나는 ‘씹선비’며 ‘진지충’ 정도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단지 ‘애들 말장난’이거나 인터넷 문화만이 아니라서 문제다. 타자에 대한 가차 없는 모멸·혐오, 그리고 자기 비하는 시대의 감성이 돼 버린 것이다. 모든 세대·계층의 한국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혐오와 비하의 굴레에 빠져있으니 자살 1위 나라의 ‘국민’일 만하다. 독거노인과 고시원의 3포 청년은 결코 남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벌레에서 다시 인간일 수 있을까?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이라 불리는 가난한 보수층 남성들을 인터뷰하여 쓴 책 <할배의 탄생>의 저자 최현숙의 ‘진보’에 대한 주문은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비하를 깊이 살피고” 잠재된 “긍정의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힘으로 모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계급과 임금과 복지의 문제가 아니”(263쪽)다. 연금이나 시혜적 복지를 넘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좌절과 존엄에 대한 침해에 대해 성찰하고 개입해야 ‘진보’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한 일이 그와 가까운 일이었다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잇달아 세월호와 5·18 유가족을 위로하고, 베트남전과 6·10 희생자를 기렸다. 그들은 국가폭력 또는 국가범죄에 당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었는데 외려 혐오와 배제의 굴레를 썼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정치가 심금은 울리지만 실제로 해결한 것은 없는, ‘감성의 포퓰리즘’이나 ‘이미지 정치’라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일베적 혐오 정서와 신자유주의적 모멸의 사령탑이자 정치적 배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9일 이후 분명 희망이 생겨나 대기 속에 흘러다닌다. 한국식 혐오문화는 ①광범위한 불평등을 반영한 능력주의와 좌절의 정념, ②떼를 짓고 ‘좌표’를 만들어 조리돌림하는 행태, ③일베식의 조악한 언어들에 의해 구성된다. 바뀔 수 있을까?
최저임금 1만원이나 병사 월급 현실화 같은 일은 변화의 중대한 배경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 혐오의 극복과 차별 없는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나 경제가 아니라 더 깊은 문화이고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려와 ‘난망’도 여전하다. 개혁 수호의 미명 아래 오히려 새로운 혐오 행태나 언어로써 여성과 소수자,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호존중의 감각과 숙고의 언어보다는 아직 이명박·박근혜 시대 증오의 정치와 단순한 진영의 언어체계가 더 익숙한 탓일까.
구체적인 몸과 정체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건강한 비판이나 ‘웃음’으로 성립하는 조건은 하나밖에 없다. 실제적인 권력과 강자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의 명명법이나 상투적인 프레임은 사람들의 차이와 맥락의 복잡함을 지워버리는 폭력이자 지적·정신적 게으름의 소치다. 우리는 ‘~녀’ ‘~남’ ‘~충’과 같은 각종 접미사와 ‘개~’ ‘갓~’ 따위의 접두사에 저항해야 한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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