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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종편 방송의 <사서 고생>이라는 프로그램이 벨기에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방영한 것이 얘깃거리가 되었다. 동양인 비하 발언과 태도가 폭력적 충돌로 이어지기 직전에 제작진이 개입해서 당황스러운 상황은 마무리되었지만, 시청자들의 분노가 인터넷 매체들에 쏟아져 나왔다. 일부 시청자는 모욕적인 장면을 그대로 내보낸 제작진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 장면은 잊기 쉽고 잊고 싶은 사실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차별은 견딜 수 없이 쓰라리다는 것. 그리고 자리가 바뀌고 관계가 바뀌면 누구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차별은 우리가 국외에서 경험하는 낯선 불의일 뿐 아니라, 우리가 타자에게, 서로에게 저지르는 낯익은 폭력이기도 하다. 너무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국회 대정부질문 등에서 일부 야권 의원들이 최저임금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차등 적용하는 법안의 필요성을 논의했다는 보도는 듣는 이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그런 법 개정을 제안하는 정치인들은 타국에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등적 임금을 받아야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외국인 최저임금 차등지급이 법제화된다면, 성별이나 출신 지역에 따라 임금을 차등지급하자는 논리도 반박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법은 힘, 자산, 신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보호장치이다.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고용 및 직업차별에 관한 국제협약 등이 국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된다고 명시하는 이유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은 필요하지만 법이 차별을 제도화해선 안되는 것이다.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왜 소수자 보호만 강조하느냐”는 질문 또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이 질문은 “강자로 규정되는 사람에 대한 법의 불평등, 역차별”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하지만 강자의 수호를 대법원장에게 요구하는 것은 합당한가. 그리고 실질적, 상징적 권력을 가진 강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것은 정의상 가능하지 않다. 장애인 인권의 보호가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일 수 없으며, 흑인, 동양인에 대한 차별금지가 백인에 대한 역차별일 수 없고, 성소수자의 인권 신장이 이성애자에 대한 역차별일 수 없는 것이다. 역차별을 부르짖는 반론은 이미 누리고 있는 다수 강자의 독점적 편의와 특권을 소수자, 약자와 나누어 갖지 않으려는 저항이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차별, 무시가 초래하는 고통에 취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보편적 취약성은 모든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서로 연결해 준다.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보편적 취약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다. 타인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는 순간 나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맞설 방도는 사라진다. 불균등한 권력관계의 제도적 모순에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나의 불안정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내리는 행위, 특권을 나눠 갖는 ‘피해’를 피하기 위해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침해된 인권에 무관심하기를 선택하는 행위는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

<사서 고생>에서 부당한 상황이 더 심화되었더라면, 영어를 할 줄 알고 체격도 좋은 박준형씨가 그저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러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면서 말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처지라면 어떨까. 그런 처지가 수년씩, 수십년씩 계속된다면? 강요된 수치심, 불안감, 분노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고 병이 될 것이 당연하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때 훨씬 더 깊어진다. 차별, 소외, 고립, 착취, 불안 속에서 여성, 빈곤층,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하청 노동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가 제도와 구조로 인해 받게 되는 아픔은 그 사회의 건강 혹은 불건강의 척도다.

김승섭 교수의 최근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말하지 못하고 싸우기 어려운 약자들의 질병과 고통에 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아픈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학교에서 받는 따돌림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다문화가정의 청소년,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여성들, 몸이 아플 때도 성과에 대한 평가 때문에 일하는 노동자들, 유해한 산업시설을 떠맡게 된 가난한 마을의 주민들은 가장 아픈 사람들이다. 국가의 방관 속에서 재난에 희생된 이들과 유가족, 가까스로 살아남았어도 특혜 의혹에 움츠려야 하는 생존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건강은 인권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들의 불건강은 약자를 볼모로 이윤추구, 기득권 독점을 위해 경쟁하는 우리 사회의 병적 구조의 반영이다. 아픔에 취약한 우리는 모두 이 사회가 강제하는 불건강과 불평등한 아픔에 대해 연대적 책임을 진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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