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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나오는 기사를 ‘달력기사’라 한다. 기념일 관련 달력기사도 많지만 그중 명절 달력기사의 역사가 가장 유구하다. ‘추석 물가 비상’ 같은 보도 말이다. 추석이란 말을 빼고 거기에 ‘설날’을 집어넣어도 무방하다. 지역의 언론사들은 하나같이 군수나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명절 물가관리대책반을 꾸린다는 천편일률의 기사를 보도한다. 여기에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급 정도의 중량감 있는 관료가 나서서 명절 물가 안정과 치안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한다. 때로는 시장을 한 바퀴씩 돌면서 사과나 배를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대통령의 부인이 전통시장에 출현해서 장을 보기도 한다. 이전 정부의 독신 여성 대통령은 명절마다 친히 직접 시장에 나가서 장을 보기도 했지만 비서들 손에 넘겨진 까만 비닐봉지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좀 지겨운 반복이어도 명절에 막상 빠지면 허전한 성룡 영화 같은 익숙한 풍경이다.

올 추석엔 배추가 문제다. ‘금치’란 말은 식상한지, 배추 한 포기를 사려면 ‘배춧잎 한 장(1만원짜리 한 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추석을 앞두고 김치를 담그려 하는데 너무 올라 걱정이라는 주부의 인터뷰는 필수다. 포장김치 회사들은 배추값 때문에 원가 상승의 부담이 커서 팔수록 손해라며 하소연한다. 그런데 왜 배추값이 폭락할 때는 포장김치 회사를 취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때는 아마도 고추값이 폭등했을 터이다. 오래도록 명절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은 농산물이었다. 그 원인으로는 봄부터 이어진 가뭄과 폭염, 그리고 이어진 늦장마나 병충해가 거론된다 혹은 곤파스, 불라벤 같은 태풍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쳐와 작물에 ‘직격탄’을 때려서다. 올해처럼 태풍이 없을 때는 우박이라도 한 번 휩쓸고 지나가 농산물은 반드시 명절 물가 상승의 주범이 되어야만 한다. 

유독 올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추석 물가’ ‘명절 물가’라는 검색어로 신문을 찾아보니 1965년부터 2017년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비상사태다. 군부독재시대 땐 물량을 잡고 있다가 추석 때 비싸게 푼 유통업자를 구속시키는 패기를 종종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경제연구원에서 9월에 발표한 올해 ‘주요 농축산 품목별 추석 출하 및 가격 전망’을 보면 과일과 채소 출하량 증가로 가격이 작년 및 평년보다 낮을 것으로 예측됐다. 축산물 공급은 작년보다 감소했지만 이는 소비 부진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살충제 계란 여파로 계란값은 여전히 바닥세다. 설날에는 너무 올라버린 계란값 때문에 계란 없이 전 부치는 비법을 전하기도 했건만. 지금 배추·무 가격은 평년보다는 높아도 작년 이맘때보다는 낮다. 산지에서 물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날씨도 그럭저럭 받쳐주어서다. 게다가 올해 재배량 확대로 김장철 배추값 폭락에 대한 우려가 나올 정도다.

소비자물가 품목에는 농수축산물과 식음료, 그리고 공공요금과 각종 서비스요금이 들어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게 농산물이다.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낮다며 동네 바보친구 취급하다가 왜 명절 때만 되면 17 대 1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일진이 되어 있을까. 아무리 올라 봐라. 배추값이 무섭나? 애들 학원비가 무섭지. 돼지고기값이 무섭나? 2년 만에 오른 전셋값 4000만원이 나는 제일 무섭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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