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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 중앙대 교수·정치학
후안 린쯔(Linz) 교수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장단점을 논의하는 이른바 정부형태 논쟁에서 세계적 권위자이다. 스페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해 온 이 노대가(老大家)는 특히 대통령제가 갖는 잠재적 위험에 대해서 신랄하고도 예리한 비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제와 내각제>라는 저서에 집약된 대통령제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마추어 국외자’의 등장 가능성이다. 내각제는 원천적으로 국회 내에서 착실하게 국정경험을 쌓아온 현역의원들만이 최고지도자에 오를 수 있지만, 온 국민이 직·간접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제에서는 역설적으로 “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정치경력이 거의 없는 국외자들이 선출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경향신문DB)
지난해 가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전후로 해서 대선주자급으로 급부상한 안철수 교수는 대통령제의 전형적 약점인 국외자 현상을 표상한다. 일체의 공직이나 정책경험이 없는 그에게 많은 유권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다 알다시피 정치경험이 없다는 역설적 신선함과 기성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젊으며, 토종 IT기업가로서의 명성은 젊은 층 유권자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하다. 이에 따라서 그의 말 한마디는 지난 수개월간 모든 언론과 유권자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안철수 교수의 침묵이 꽤 오래 이어지고 있다. 간헐적으로 산중(山中) 스님들의 법문에 버금가는 “말씀”을 내놓고 있지만, 그 말씀은 매우 추상적이거나 혹은 단편적일 뿐이다. 최근에만 해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출과정의 문제와 그에 따른 극심한 내분, 중도를 표방한 새누리당의 지지율 상승과 총선 승리, 미국 의회의 한반도 핵무기 재배치 결의안 통과 등과 같은 굵직한 이슈들이 줄을 이었지만, 안 교수는 이러한 중대 이슈들에 대해서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안 교수의 침묵은 두 가지의 중대한 빈곤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정치인으로서의 결단력 빈곤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지식의 부족이다. 예컨대, 지난해 말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급서하고 김정은 체제가 등장했을 때에도, 또한 이 봄에 통합진보당의 분열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도, 안 교수가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이런 중대한 사태의 의미를 빠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학 교과서는 흔히 대통령의 주요 자질로 결단력을 꼽고 있지만, 차기 대통령이 처하게 되는 현실은 교과서에서 논의되는 것보다 훨씬 긴박하고 극적일 것이다. 굳이 서해교전과 같은 충돌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평양-베이징-워싱턴-도쿄의 지도자들은 한국의 새 대통령의 용기, 결단력, 위기관리능력을 시험해 보려 들 것이다. 한국 지도자들은 견디기 힘든 중압감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위기 앞에서도 대립하는 여론을 어떻게 설득하고, 동시에 정부 결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유지할 것인가? 이러한 이슈들은 비단 중국이나 미국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유권자들도 안 교수에 대해서 궁금한 점일 것이다.
안 교수가 침묵하는 또 다른 배경은 정책지식의 부족일 것이다. 그는 최근 들어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들과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구 4500만명에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거느린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이슈들은 실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물론 안 교수는 미래 경제질서 구상, IT를 포함한 과학기술 전망과 의미 등에 대해서 신선한 통찰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난마처럼 얽혀있는 남북관계와 점차 험해지고 있는 동북아 안보질서, 에너지·환경 이슈, 활력과 형평의 균형을 지향해야 하는 복지,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주목할 만한 구상을 내놓은 바 없다.
지금껏 여러 대통령제 국가에서 신선하지만 경험없는 국외자들은 종종 정부의 실패를 불러왔다. 안철수 교수가 국외자 신드롬에서 벗어나려면 지금의 침묵을 깨는 첫 번째 결단부터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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