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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이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는 게 바로 위기이다. 이러한 공백기에는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나타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다. 한두 번 본 문구가 아니지만 유독 지금 가슴에 와 닿으며 남다른 울림을 주는 것은 왜일까?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수도 진보도 자신의 진영 안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 박근혜 정부와 여야라는 권력의 방치와 무능으로 세월호 참사의 시계는 아직 2014년 4월16일에 멈춰 있고 유가족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세월을 견딘다. 광화문광장을 둘러싼 차벽의 안팎처럼 세상은 두 진영으로 쫙 갈라져 있다. 진영이란 말이 본디 군사용어였음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오늘이다. 46일 단식으로 쇠약해진 환자 김영오씨에 대한 도를 넘는 인신공격, 9시 등교제에 대한 편가르기식 찬반논쟁 등 진영 논리에 갇혀 갈등을 무한반복하는 현실이 바로 그람시가 말한 병적 징후라 할 수 있다.

낡은 것은 분명 사라지고 있다. 보수의 지배서사였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도 힘을 잃었고 진보의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도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새로운 길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2000년대에 등장한 뉴라이트가 시장적 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를 설파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이론적 확장을 하지 않은 채 멈춰 있다. 그래도 보수는 뉴라이트가 등장하면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혁신’을 추구했고 연이어 집권에 성공했다. 반면 진보는 새로운 걸 내놓지도 못한 채 보수를 수구라 비판하는 데만 몰두했고 그들로부터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돌려받았다. 야당이 계속되는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혁신의 쇼조차 하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빠진 건 무(無)혁신의 당연한 결과다. 누구에게든 위기지만, 진보에게 더 위기인 시대가 바로 2014년 오늘인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방황 중이다. 세월호의 시계처럼 멈춰 있다.

작년 재보선 당시 낡은 정치 타파를 외치며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안철수 후보 (출처 : 경향DB)


이 역사적 위기의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 현상이 바로 과거로의 회귀를 즐기는 복고산업의 번성이다. 지난해 영화 <변호인>의 돌풍에 이은 올해 TV사극 <정도전>과 영화 <명량>의 흥행 신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위기란 정치가 민의를 읽어내지 못할 때 온다. 정도전과 이순신에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 시민의 삶을 외면하는 정치와 무능하고 자기 안위적인 리더십에 피로감을 느끼던 차에 ‘과거’ 조선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 개혁을 구현하고 백성의 삶에 중심을 둔 리더십을 추구했던 그들에게서 심리적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하비 케이는 <과거의 힘(The Powers of the Past)>에서 미국의 복고산업을 소개하면서 과거를 상업적 소비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미국에서 불황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일상화되어버린 경제적 위기,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자유주의적 합의가 깨지고 갈등이 심화되는 사회적 위기,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는 등의 정치적 위기가 한꺼번에 분출했음에 주목했다. 그 시절 미국인들이 답답한 현실을 과거로의 도피를 통해 해소하려 하면서 과거와 전통을 산업화한 복고산업이 더욱 번창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로 회귀하여 그 시공간과 사람에 빗대어 오늘을 이야기하는 복고산업의 융성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과거 회귀의 길목에도 새로운 담론이나 전망을 빚어낼 수 있는 ‘교훈적’ 단초가 존재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사라진 낡은 과거보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모색에 더 힘을 쏟아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공백기가 길어지고 병적 징후가 깊어질수록 세상은 거칠어지고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참 좋은 과거를 좇지 말고 참 좋은 미래를 꿈꿀 때다.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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