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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년이 지났다. 작년 12월, 동부병원에서는 알코올해독센터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노숙인 자활 의무보조원 면접이 진행되었다. “술 끊은 지 얼마나 되셨나요?” “저… 4개월이요. IMF 때 노숙을 시작했고 술에 빠졌어요.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은 적 있어요.” 면접관 중 한 간호사가 그분을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환자들 중에 거친 분들도 계신데 달래고 설득해가며 씻기고 돌보는 일을 하실 수 있겠어요?” “의사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술 안 먹고 처방 받은 약만 매일 잘 먹으면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요. 저 일할 수 있어요.” 밀랍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서 한 단어씩 끊어가며 힘겹게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날 열 사람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최근까지 알코올 중독자였거나 정신질환을 앓고 회복 중인 노숙인이었다. 그리고 1년, 지금은 열두 사람이 일하고 있다. 얼마전 병원 대강당에서 개최된 <알코올해독 ‘서울모델’ 심포지엄> 중에는 그들의 현장소감을 발표하는 특별세션이 있었다. 몇 대목을 공유하고 싶다.

“살고 싶다는 애착도, 용기도 그 무엇도 가슴속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지금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세상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구나! 돈을 받고 대가를 받고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나에게 고맙다는 환자분들 속에서 이제야 나도 삶의 즐거움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처럼 즐거울 때 즐거워할 수 있고 슬플 때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간혹 씻기를 거부하거나 욕설과 폭력을 하는 환자를 대할 때면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대처하고 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 내가 참 하찮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독자입니다. 환자들을 돌보면서 나도 같이 회복한다는 마음으로 근무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근무하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어떤 노숙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일년은 씻지 않았을 것 같은 초췌한 모습에, 초점 없고 감정도 없는 눈동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목욕을 시키는데 이상해서 얼굴을 쳐다보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발에 동상이 너무 심해 양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당황스러워 ‘혹시 많이 아프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기운이 없어 말할 힘이 없는지 아니면 말하는 것을 잊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목욕시켜주어 감사합니다.’ 그 말에 담긴 마음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소외될 때 사람들은 안도감을 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어떤 것을 갈구하게 된다. 그것이 알코올, 도박, 게임, 약물, 어떤 것이든 점점 건강을 잃어간다. 하지만 사랑하는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영유하고 싶은 좋은 결속과 교류 관계가 생기면 사람들은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있던 중독에서도 빠져나온다.

브루스 알렉산더의 유명한 중독실험이 있다. 우리에 쥐를 한 마리 넣고 물병을 두 개 매달아 놓는다. 하나는 그냥 물이고 다른 하나는 마약이 든 물이다. 그럼 우리 안에 고립된 쥐는 마약이 든 물을 선택하고 마구 마시다가 빠른 속도로 죽어간다. 한편 우리를 놀이공원 같은 곳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넉넉한 치즈, 가지고 놀 공과 터널, 결정적으로 많은 친구 쥐들이 함께 있다면… 쥐는 더 이상 마약이 든 물을 미친 듯 마시지 않는다. 호기심에 잠깐 복용하더라도 남용하지 않는다.

현재의 자활 의무보조 프로그램은 단순한 일자리를 넘어 의료진과 자활 노숙인과 중독환자들 서로에게 꼭 필요한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신도 겪어온 같은 처지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면서 잊었던 자존감과 행복감을 되찾는다고 말한다. “마음 편하게 누구의 미움도 받지 않고 신나게 일하고 있어요.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저는 금방 시들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부병원은 우리를 인정해 줍니다.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 이곳입니다.”

이 일자리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아직 모르겠다. 상당한 성과가 이미 확인되고 있는 바, 보다 양질의 안정적인 일자리로 제도화되어 쭉 성장하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다가오는 성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 모습으로 탄생한 예수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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