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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과 생산자들 화를 돋운 일이 있었다. 사과박스 때문이었다. 사과박스에 1만원권을 가득 채우면 1억원이 들어간다나 뭐라나. 5만원권이 등장한 이후 사과박스가 아니라 ‘비타500’이라는 자양강장제 박스가 뇌물 운송수단으로 새롭게 바통 터치. 전두환씨 집에서도 모 정당 대표의 트렁크에서 발견된 그 사과박스는 ‘차떼기’의 운송수단이었고, 사과 생산자들은 우리의 귀한 사과가 왜 그 더러운 손과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지 항의했다.
‘부정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1년여 만에 다시 손을 보았다. 선물비의 경우 상한액을 5만원으로 유지하지만 농축수산물과 원재료 50% 초과 농축수산물인 가공식품에 한해 상한액을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상향조정했다. 중언하면 화훼를 포함한 농축수산물 가액 한도를 10만원으로 상향조정한 것이 골자다. 작년 이 법이 공표되면서 농업계에서 한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농민의 사정도 저마다 다르니 말이다. 축산과 화훼, 인삼 쪽에 속해 있는 농민단체들은 그간 김영란법에 아예 농축수산물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라는 요구를 해왔다. 상대적으로 고가의 농산물인 한우나 인삼은 10만원에 맞추기가 매우 어렵고, 결국 수입 농축수산물만 좋은 일 아니냐며 이번 조정안에 우려를 표하는 중이다. 반면 농산물을 잠재적 뇌물 용도로 여기는 것 자체에 분노도 많았다. 농사지어 내어놓은 농산물은 먹거리이지 뇌물용이 아니라며 부정청탁금지법 자체에 대한 환영 논평을 작년에 냈다.
속내는 복잡하지만 선물 한도 금액을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높인다 하여 농민들에게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다. 벌써부터 유통업체 좋은 일만 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사실 10만원이든 5만원이든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 자체가 문제다. 기존의 김영란법에서도 이해관계 없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선물은 가액 한도가 없노라 누누이 말해왔다. 선물하고 싶으면 농축수산물 수백만원어치를 선물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10만원짜리더라도 청탁성 의도가 다분하다면 액수와 상관없이 그저 뇌물일 뿐이다. 내가 100만원짜리 한우세트를 줄 수도 있지만, 법리상 10만원짜리밖에 줄 수 없으니 잘 봐달란 뜻이 숨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마는 것만이 정도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타격을 받았다는 언론기사는 없었다. 명절 때 고급 갈비세트도 잘 나갔고 실속형 세트도 잘 팔려나갔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본래 대다수의 시민들은 동네 대형마트나 시장에서 소박한 선물세트를 주고받고 살아왔다.
농축수산물이 가장 많이 오고가는 시기는 명절 즈음이다. 핵심은 국내 농축수산물의 일상적 소비의 진작이다. 소비 진작은 당연히 농어민들의 안정적인 소득 보존과 맞물린다. 국내의 농축수산물을 누구나 평소에 즐길 수 있는 방식들을 고민하고 농민의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정책을 짜는 것이 맞다.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이나 농민들의 기본소득 보장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두고 5만원이냐 10만원이냐 하는 화투판 판돈 계산하는 수준으로 농업 문제를 전락시켰다. 요 근래 농민들과 먹거리운동 조직들은 먹거리 기본권과 농민권리 보장을 헌법에 명시하기 위해 ‘농민헌법제정운동’을 펼치느라 바쁘다. 헌법에 농민·농업·농촌의 가치를 명시하려고 애를 쓰는 와중에 이 쪼잔한 싸움은 대체 뭔가. 사과박스 차떼기의 악 추억이 다시 떠오르는 연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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