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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명한 경영대 교수가 우리나라 의료산업의 국제경쟁력 순위를 산출했다는 언론기사를 접했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지만, 메일 주소를 수소문해서 관련 자료를 받아볼 수 있는지 여쭙는 메일을 보냈다. 며칠 후,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는 내용과 함께 자료를 받아볼 수 있었다.

자료에는 산업분야별 국제경쟁력을 평가하는 데 널리 활용되는 방법론을 적용해 의료산업의 국가경쟁력 순위를 산출한 결과가 실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순위는 66개 비교 국가들 중에서 중간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리병원 허용,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의료부문의 규제 완화와 경쟁 확대 등 소위 ‘의료영리화’로 일컬어지는 해법들이 제시돼 있었다. 그런데 이해

가 되지 않았던 점은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이 국제경쟁력 순위의 1위부터 3위까지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북유럽 국가들은 의료의 공공성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다수 병원은 정부 소유의 공공병원이고, 심지어는 동네의원과 약국까지 공공기관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의료비의 대부분도 공공재정에 의해 해결된다. 의료영리화의 정반대 편에 있는 국가들이 의료산업의 국제경쟁력이 가장 높은 것이 의아해서, 그 이유를 묻는 메일을 다시 보냈지만, 답장은 끝내 받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이 국가들이 제약, 의료기기, 의료소재, 생명공학산업의 강국이고, 이것이 의료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인 이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국가들은 다수의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화학상,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기초과학 분야의 전통적 강호이다. 북유럽식 교육으로 창의적인 고급인력이 안정적으로 배출되고, 패자부활을 보장하는 튼튼한 사회안전망 때문에 젊은이들이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것도 끊임없는 기술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였다.

의료의 산업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의료는 국부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유력 산업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의료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와 의료영리화가 같은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의료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의료영리화의 외길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런 정부의 고집 탓에 오히려 국제경쟁력 제고의 기회와 국가적 역량이 소진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집요하게 추진되던 의료영리화 정책이 올해 대미를 장식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의료정책을 관장하는 보건복지부를 제쳐 놓고, 경제부처들이 전면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실손의료보험의 진료비 심사 업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기관은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다. 보험회사의 수익을 위해서 공공기관에 보험가입자의 진료내역을 심사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민간의료보험이 판을 치는 미국에서도 이런 경우는 없다.

범정부 차원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원격의료는 미래창조과학부 예산으로 추진된다. 원격의료는 아직까지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진국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원격의료를 확대하려는 이유를 정부 관계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돌아온 대답은 “대통령이 중남미와 중국을 방문해서 원격의료 수출 협약을 맺고 왔다. 그런데 국내 활용 실적이 있어야 수출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무조건 원격의료를 확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였다. 원격의료 수출을 위해, 국민은 졸지에 임상실험 대상자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의료영리화법으로 지칭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기획재정부가 맡고 있다. 이 법은 무소불위의 초월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수립한 기본계획에 따라서, 보건복지부는 실행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기획재정부는 온갖 의료 관련 규제의 목을 칠 단두대와 의료영리화 추진의 백지수표를 동시에 갖게 된다. 정부는 정작 중요한 의료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는 내팽개친 채 보험회사의 수익을 늘려주고, 안전성과 효과성이 모호한 원격의료와 국민의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부추기는 방안에 몰두하고 있다. 나라가 하도 뒤숭숭하니, 의료영리화 정책들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도 상대적으로 옅어졌다. 정부가 연내에 이 정책들을 마무리 짓겠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자칫하면, 올해가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의료영리화의 원년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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