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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대표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가정폭력보호시설에 가해자가 침입했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 격리 등의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정폭력 가해자를 옹호하고 비호했다는 것이었다. 참 어처구니없다 싶었는데 이어진 그녀의 말에 더 기가 막혔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과 대처는 어쩌면 이렇게 바뀌지 않을까요?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기자회견 구호가 30년 전과 똑같아요. 다르게 정해보려고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몰라요.” 이럴 땐 분노보다 절망감이 앞선다.

올 상반기에만 4565명이 ‘데이트폭력’으로 검거됐다. 폭행, 스토킹, 온라인 성범죄 등 주로 여성들을 겨냥한 ‘젠더폭력’은 갈수록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으나 가정폭력처럼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격리해 보호하는 조치도 없고 강력 대응할 법적 근거도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출처: 경향신문DB

사건은 이랬다. 지난 2일 저녁 8시경, 한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에 가해자가 ‘침입’했다. 그는 “자녀를 보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버텼다. 흔히 ‘쉼터’라고 부르는 보호시설은 단어 뜻과 달리 쉬는 곳이 아니다. 무자비한 폭력에서 탈출해 갈 곳 없는 피해자들이 최소한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찾는 피난처이자 삶의 마지막 보루다. 이곳에 가해자가 무단 침입한다는 것은 쉼터 거주자들에게는 공포와 위협이자 또 다른 폭력임을 의미한다.

그날 그 가해자가 보자고 했던 아이는 엄마와 함께 쉼터에 온 뒤 꿈을 꿨다고 한다. “꿈에서 몸에 개미가 자꾸 나와 옷을 열어보니 아빠가 나왔다”며 엄마에게 “너무 무섭다. 여기는 안전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가정폭력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했으며 피해자 보호라는 책무를 방기한 채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서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피해자와 활동가가 보호시설 위치를 노출시켰다며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가 하면, “가해자가 자녀만 보면 돌아갈 사람이다”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며 가해자를 격리시켜 달라는 보호시설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은 한 수 더 떴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들이 빠져나가야 하니 이동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단다.

결국 격리조치돼야 할 가해자는 남고 11시가 넘은 한밤중에 피해자가 공포에 떨며 피신해야 했다. 활동가들이 현수막으로 가해자의 시야를 가리며 최소한의 안전조치를 취하는 동안 가해자는 활동가들의 사진을 찍으며 위협했지만 경찰은 이마저도 방치했다.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피해자 보호시설을 설치한 지는 30년이 흘렀다. 지난 5년간 신고건수는 20배가량 늘었지만 제대로 사법처리된 것은 극히 드물다. 여성단체들은 최근 ‘1OF10000TO10000OF10000’이란 암호 같은 숫자를 새긴 팔찌를 나눠주며 가정폭력 추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자 1만명 중 신고한 이는 130명에 불과하며 이 중 1명만이 구속되는 현실에서 범죄자 모두 제대로 처벌받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하는 간절함을 담은 것이다.

가정폭력에 대응하는 경찰의 안이하고 미흡한 조치로 피해를 신고한 여성이 가해자에게 더 큰 보복을 당하는 일은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된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이번 사건 이후 여성단체가 전개하고 있는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이라는 해시태그 운동에는 10만명가량이 동참해 자신이나 이웃이 당한 사례를 줄지어 고발하고 있다. 이웃의 가정폭력을 신고했더니 현장에 온 경찰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 사람 원래 자주 그러는 사람이고 여자도 드세고 자꾸 대들어서 그렇다”고 말하는가 하면 신고한 이웃에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가해자를 전혀 제지하지도 않았다는 등의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경찰의 안이한 인식과 대응, 가해자에 대한 미진한 처벌은 현행법의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가정폭력처벌법은 ‘가정폭력 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고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가정폭력은 가정 내의 경미하고 사소한 다툼이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고서는 이런 법 조항이 만들어질 수 없다. 이 경우 가정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란 더욱 어렵다.

가정폭력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성별 권력관계에 근원을 둔 성차별이며 젠더폭력이다. 가정폭력이 심각한 이유는 신체적으로 때리고 공격할 뿐만이 아니라 여성의 온 삶을 통제하고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훼손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오늘 쓴 글 중 새로운 관점이나 이론은 없다. 지겹지만 30년 동안 제기된 주장을 고스란히 다시 담았다. 여성단체들이 외쳐온 것처럼 “가정폭력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인간적 삶과 존엄한 삶의 복원을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상이 이런데 민주화가 됐다고, 촛불혁명을 완수했다고 자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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