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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인원 202만여 명, 시위횟수 1500회, 구속자 4만7000여 명, 사망자 7500여 명. 우리 민족 최대(最大)·최고(最高)의 전 국민 항쟁, 3·1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신분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온 국민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맞서 떨쳐 일어난 세계사에 드문 항쟁이었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고 그 결과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가 주창한 자주(朝鮮 獨立國), 자유(自由的 精神), 단결(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의 기치는 우리 현대사의 고비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돌린 국민항쟁의 사상적 저수지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또한, 아시아 여러 식민지 약소국의 민족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5·4운동, 베트남·필리핀 독립운동을 추동하였고, 민족자결, 반제국주의, 비폭력 정신은 아시아 반제국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3·1독립만세운동이 갖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 외세의 극복만을 주장한 운동이 아니었다. 3·1독립만세운동 100년은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과 추구할 가치를 담은 설계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뿐만 아니라 왕정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꿔 ‘백성’이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봉건시대를 마감하고 근대의 시간으로 진입한 것이다. 인류평등과 공존, 세계평화를 주창해 세계시민으로서 추구할 가치도 분명히 했다. 이렇듯 3·1독립만세운동은 역사교과서 일부를 장식하는 유산이 아니라 우리가 가꾸어 후대에게 이어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 전문은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3·1독립만세운동에는 33인으로 대표되는 민족지도자, 여러 이유로 독립선언서에 늦게 서명한 사람들, 그리고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가진 민초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하와이, 미국 등에 거주하던 교포들, 외국인들, 그리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선교사들의 수고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분은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다. 박사는 당시 탑골공원과 시청 앞에서 벌어진 3·1독립만세운동 현장과 제암리 학살사건의 처참한 상황을 사진으로 담아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린 분이다. 그 후에도 일제의 부당한 처사와 한국인들의 독립 염원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3·1독립만세운동의 기록자와 홍보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그분을 한국사회는 민족대표 33인에 이어 34번째 민족대표라 부른다.

영국 태생의 캐나다 수의학자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처음 내한하여 의학교육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1920년 타의에 의해 고국 캐나다로 돌아갔다. 캐나다에서 세계적인 교육자와 수의학자로 명성을 얻던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을 맞이해 국빈으로 한국에 다시 왔다. 다시 방한한 박사는 서울대 등에서 수의학을 가르치며 당시 정치와 기업과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부정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수많은 고학생과 과부,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 나 역시 중학교에 들어갈 13살의 나이에 학비가 없어 진학을 포기할 시점에 스코필드 박사를 만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인생의 멘토링까지 받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 지배를 받던 때에도, 그리고 해방과 전쟁을 겪고 빠른 경제성장을 시작하던 1960년대에도 한국사회를 정의와 남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3·1정신’을 강조했다. 인류애, 선한 의지를 가진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 정의감의 확립,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불의와 부패에 대한 투쟁 등은 3·1독립만세운동을 겪으면서 스코필드 박사가 다듬어온 소중한 가치였다. 스코필드 박사가 추구한 독립과 자유, 희생과 봉사의 3·1정신은 지금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년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시민사회가 나름의 준비를 하는 듯하다. 이 기회에 한 가지 꼭 요청하고 싶은 사안이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70년 소천하실 때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3·1정신을 가르치고 계승할 수 있는 (가칭) 3·1회관을 짓자고 했다. 1919년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외친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한국사회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국가 차원에서 3·1정신을 가르치고 계승할 회관이나 센터가 없다.

역사와 정의가 사라진 시대, 불의와 억지가 가짜 뉴스와 결탁해버린 시대에 스코필드 박사가 그렇게 강조한 3·1정신을 담아내고 전승할 3·1회관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 건립되기를 소망한다. 역사를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

특히, 3·1독립만세운동은 대한민국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해 가꿔나가야 할 우리의 정신적 뿌리다. 하나로 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나섰던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은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에 꼭 필요하다. 3·1회관 건립은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높이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100년을 준비한다는 의미가 있다. 3·1회관을 건립하는 일에 국회,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동참했으면 한다.

반세기 전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말을 되새기게 된다. “우리는 가능한 한 탑골공원 가까운 곳에 3·1회관을 건립해야 한다. 풍요한 사회나 복지국가에 앞서 정의의 사회부터 이룩해야 한다. 이것만이 헛되이 안전만을 찾는 현 세계에서 힘을 가져다주는 길이다.”(동아일보 1969·3·1)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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